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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유적탐방] 보물로 지정된 인조별서 유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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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3-11 22:58:50 수정 : 2022-03-11 22: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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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별서유기비

1623년 3월 12일 저녁부터 능양군(후의 인조)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삼경(밤 12시)을 기해, 광해군 정권을 타도할 반정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능양군은 이미 이귀, 김류, 최명길, 신경진 등 반정을 주도할 세력과 교감하고 있었다. 신경진은 능양군을 추천하면서 “바로 선조의 친손인데 총명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니 하늘이 주신 바이다”고 했다. 반정 당일 인조는 연서역(延曙驛·현 은평구 역촌동)에서 친위부대를 이끌고 이서(李曙)의 부대를 맞으면서, 반정에 직접 참여했다. 인조가 반정에 직접 참여한 데에는 광해군과의 악연이 컸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으로, 동생 능창군이 광해군 초반 신경희의 역모 혐의에 연루되어 자진(自盡)하였고, 정원군은 화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인조가 머물렀던 집은 아버지 정원군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서울 은평구 역촌동 인근이다. 인조가 이서의 부대를 연서역에서 맞은 것도 자신의 집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조의 증손자 숙종은 이곳이 인조의 잠저(왕이 되기 전에 머문 집)임을 기억하면서, 1695년(숙종 21) 기념비와 비각을 세우고, 담장을 두르게 했다. 비석 앞면의 큰 글씨는 숙종의 필체이며, 뒷면의 글은 숙종이 직접 짓고 글씨는 이항이 썼다. 비의 전체 높이는 291㎝, 몸체 높이 168㎝, 폭 72㎝, 두께 26㎝이다. 비석의 아래에는 귀부(龜趺)가, 그리고 그 아래에는 10각 화강석으로 된 이중 기단이 있다. 비석의 정식 명칭은 인조별서 유기비이다. 조선 후기 비석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보물 제1262호로 지정됐다. 은평 역사한옥박물관에는 이 유기비를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6호선 구산역 2번 출구를 나와 조금 걸으면 서울에서는 흔치 않게 보물로 지정된 비석 원형을 만나볼 수가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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