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온라인 슈팅게임 상에서 ‘타이완 넘버원’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온라인상에서 각종 ‘비매너’를 일삼던 중국인들에 대한 전 세계 사람들의 조롱이었다. 이 말을 들은 중국인들은 욕설로 추정되는 고함을 지르며 총을 쏘거나, 아예 중국 국가 ‘의용군행진곡’을 틀어놓으며 이성을 잃고 돌격했다.
게임 이용자들이 대만을 좋아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 말은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 특수성을 이용해 그들의 자존심을 뭉텅 긁는 마법과 같은 언어였다.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는 나라의 정통성이 중국이 아닌 대만에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경제와 기술 측면에서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만에 비해 중국은 아직 부족하다는 콤플렉스도 자극하는 말이었다.

오늘날 젊은 세대의 반중감정은 더욱 견고해졌다. 표현의 수위도 ‘반중’을 넘어 ‘혐오’까지 올라갔다. 조롱을 넘어 중국과 중국인 모두를 부정한다. 가끔은 85년 전 중국 난징대학살 사건을 소재로 사용하며 중국을 미워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웃국가끼리 사이가 좋은 경우는 드물지만, 오늘날 동아시아는 광기의 역사 속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반중감정은 생각보다 오래됐고, 깊으며, 현재진행형이다.
운동권 세대로 불리는 4050세대는 청년시절부터 중국인을 마주하는 경험이 많지 않았다. 또 미국의 대항마로 성장한 중국을 보면서 또다른 기회와 희망을 느끼며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기도 했다. 이들은 2030세대의 반중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청년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온라인과 대학교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2010년대에 들어 중국 유학생이 갑작스럽게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학업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이들도 많아졌고, 이는 한국 청년들의 가슴속에 혐오라는 씨앗으로 남았다.
사람의 기억은 누가 언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지 일일이 떠올리지는 못하지만, 불쾌한 경험을 했던 감각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다. 혐오의 씨앗을 발아시킨 것은 한·중 위정자의 태도였다. 시진핑이라는 ‘스트롱맨’이 미국을 상대로 ‘그레이트게임(주도권을 두고 벌이는 패권다툼)’을 벌이면서, 이웃국가를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는 ‘한류금지령’, 한국문화를 자국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문화공정’ 등이다.
여기에 한국 위정자는 실리를 표방한 다소 소극적인 외교로, 젊은 세대가 보기엔 굴종적인 외교로, 중국을 대하면서 청년들의 반중감정은 폭발하게 된다. 현 정권은 한국이 선진국임을 강조하면서 자국민의 자존심을 살려줬지만 중국을 대할 땐 그러지 못했다. 최근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나타난 반중감정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혐오가 좋은 것은 아니다. 혐오가 나쁘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혐오는 나쁜 거야”라고 무턱대고 가르쳐 들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왜 미워할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해 없는 가르침은 반발심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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