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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듯… 싸락눈 내린 한강변 쓸쓸한 마음만 소복이 쌓여있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2-02-19 11:00:00 수정 : 2022-02-19 09: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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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겨울의 질감

전면 채운 푸른 빛에서 시린 향 풍겨
거대한 서울 속 공허감·상실감 연출
일상에서 직접 마주하는 도시 공간
단순 재현 대신 장면 속 심리에 주목
들뜨지 않은 색채·붓질로 질감 표현
보이지 않는 풍경·작가 감정과 교감
‘밤눈’(2021) 갤러리 소소 제공
#배웅 같은 겨울 기억

뒤늦은 한파가 불었다고는 하지만 벌써 햇살은 봄이다. 영하의 날씨에도 정오 무렵 탁 트인 공원을 걸으면 몸이 따뜻하다. 계절을 맞이하는 일은 매해 네 번씩이니 벌써 수백 번의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새로운 계절이 오는 것은 여전히 신기하고 그만큼 지난 계절을 떠나보내는 일은 여전히 낯설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 듯 박준 시인은 산문집 ‘계절 산문’에서 다음 문장을 썼다. “잘 가라는 배웅처럼 한결같이 손을 흔드는 기억들. 하지만 얼마쯤 지나 돌아보면 다시 오라는 손짓처럼 보일 것입니다.”

지난 몇 달간 함께한 겨울은 사람만큼 매력이 있었다. 겨울 냄새가 한껏 났고 함박눈이 세 번이나 왔다. 싸라기눈이 아닌 눈송이가 커다란 순백의 눈은 오랜만이었고 감동을 주었다. 눈이 내리는 날마다 아파트 단지를 가득 채운 눈오리와 눈사람이 귀여웠다. 새하얀 새벽 창밖을 보면 바라던 겨울 풍경이 거기에 있었다. 생의 한 시절을 보내듯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지금 그나마 다행인 건 그림이 있어서다. 노충현의 ‘밤눈’(2021)은 우리가 그리워할 겨울의 모습을 그림으로 눈앞에 펼쳐 준다.


#노충현이 그리는 서울 풍경

노충현(1970)은 특유의 서정적 풍경화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자기 생활이 있는 도시의 풍경과 공간을 주로 그린다. 다만 눈앞의 장면을 재현하기보다 장면 속 심리, 사회적 상황을 화면에 옮긴다. 그 과정에서 자기 정서를 더해 형성하는 분위기로 작품을 완성한다.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사루비아 다방, 국제갤러리, 조현화랑, 관훈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아르코미술관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지난 해 갤러리 소소, 챕터 투 등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노충현은 2005년부터 현재까지 ‘살풍경’, ‘자리’, ‘실밀실’ 등의 연작을 선보였다. 이 중 처음 선보여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알린 것은 ‘살풍경’ 연작이었다. 살풍경의 사전적 의미는 보잘것없이 메마르고 스산한 풍경이다. 작가는 이 연작에서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서울이라는 도시의 모습을 다루었다. 서울은 거대하고 화려한 메트로폴리탄이지만 그 안의 삶은 어쩐지 메마르고 스산했다. 거기서 비롯하는 공허와 상실의 정서를 황량한 풍경으로 담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사람 밀도가 적은 한강공원 등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다.

‘자리’ 연작은 ‘살풍경’ 연작의 맥락에서 부재(不在)와 장소 또는 공간을 다룬 작품이었다. 작가는 가족들과 동물원에 갔다가 우연히 우리가 지닌 모순을 발견했다. 우리는 분명 하나의 공간이지만 초점은 늘 그 안의 동물에 집중하기 마련이었다. 우리라는 공간을 보게 만들기 위해서는 동물을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물을 제외한 우리 공중에 매달린 폐타이어, 나무 구조물 등으로만 화면을 채웠다. 관람자가 앞에 서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는 정체성 모호한 빈자리가 드러났다. 사람이 없으면 제 역할을 잃는 도시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최근 성산동 부근에 작업실을 얻은 후 걷는 홍제천을 그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작가에 의하면 홍제천은 한강공원보다 폭이 좁고 나무와 풀이 무성해 더 내밀하고 고요한 정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출근 또는 산책을 하며 오가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홍제천에 있으면 보이는 내부순환로 교각에서 늘어지는 그늘은 그들을 품는다. 홍제천 작업은 그간의 작업에 비해 초록 그리고 노란색이 많이 등장한다. 쓸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온기 또는 애틋함이 전해져 인상적이다.

#노충현이 그리는 겨울 질감

노충현의 작업은 늘 그림 속 장소를 방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방문하는 횟수는 여러 번이며 때로는 매일이 되기도 한다. 강가의 벤치 등에 앉아 시간을 보낼 그는 우선 풍경을 눈으로 담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카메라를 들어 풍경을 사진으로 남긴다. 그 사진을 작업실에 돌아와 컴퓨터에 옮기고 포토샵 등을 통해 수정하기 시작한다. 우리에서 동물을 지웠듯 불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것들은 화면에서 지운다. 이 과정을 통해 풍경은 맥락을 형성하고 자기 인상을 갖는다.

하나의 인상을 가지게 된 풍경은 물감으로 화면에 옮겨진다. 테라핀 비율을 높여 만든 오일 페인트는 차분한 색채를 구사한다. 70년대 컬러 사진에서 보일 법한 하늘색, 상아색, 회색 등이다. 이 색들은 관망하는 듯한 작가의 시선처럼 넓적한 붓을 사용해 넓게 칠해진다. 때로는 붓에 물감을 바른 뒤 반대 방향으로 긁어 나아가 캔버스에 더 얇게 펼친다. 붓질을 반복할수록 화면 속 풍경이 비어 있어도 화면 그 자체는 밀도가 높아진다.

‘밤눈’과 마찬가지로 한강공원의 장면을 보여준다. 여름날 사람으로 가득 차는 한강 수영장을 그는 장마에 아무도 없는 날 보고 그렸다. ‘장마’(2021) 갤러리 소소 제공

노충현의 풍경화를 특징 짓는 정서와 분위기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쓸쓸한 장소 또는 공간에 집중하고, 빛 바랜 듯한 색과 들뜨지 않은 붓질이 그것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작품을 보는 이는 이 분위기를 통해 작품 속 장면을 시각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넘어선다. 풍경을 경험한 작가처럼 감각과 감정을 동원해 보게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과 그 앞에서는 항상 표면보다 내면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풍경의 질감을 감각하게 된다.

노충현은 지난 20여 년간 분명 다양한 시간과 다양한 장소를 그렸다. 그런데도 작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겨울의 한강이다. 이러한 연상이 틀린 것은 아닌 듯 작가는 언젠가 작가 노트에 다음같이 썼다. “나는 늘 풍성하고 그윽한 자연 앞에서 망설여왔다. 풍경과 마음이 교감해야 그 대상을 그릴 수가 있는 것인데, 봄의 싱그러움이나 여름의 풍성함을 그리기에는 마음이 빈곤했다. 그 마음으로는 모든 계절을 품기 어려웠다.”

‘밤눈’(2021)은 이러한 겨울날 한강을 담고 있는 작가의 작업이다. 여기에 한강 공원이 있고 싸라기눈이 끝도 없이 내린다. 눈이 땅 위를 하얗게 덮었지만 포근함보다 축축함에 가깝다. 단 몇 명의 사람들은 그마저도 각자 갈 길만을 간다. 이들이 지나고 남을 흔적처럼 자동차 바퀴 자국이 선명하다. 전면을 채우는 푸른 빛에서 공기의 시린 향이 풍겨진다.

#손짓 같은 겨울 기억

노충현은 “여름의 풍성함을 그리기에 마음이 빈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찬 풍경보다 빈 풍경으로부터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은 더 긴 시간 끝에 온다. 시간은 항상 마음을 소요하기에 그의 그림 속 풍경이 풍성하지 않아도 거기엔 늘 더 많은 마음이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가 울고 있을 때 그 곁에서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일 것 같다. 그의 그림일 것 같다.

삶을 돌아볼 때 긴 여운을 남기는 감정은 항상 기쁨보다는 쓸쓸함에 가까웠다. 노충현의 그림에서 자라난 여운이 계절을 넘어 오래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밤눈’을 본 오늘은 여름날 따갑게 내리쬐는 뜨거운 볕 아래서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을 지나면 그 기억이 곧 다시 오라는 손짓이 되어 우리를 겨울로 부를 것이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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