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년 함께한 호랑이
호랑이 보은·호랑이 잡은 기름 강아지 등
한국구비문화 12지 설화 중 40%나 차지
전통미술선 용맹·벽사·신앙적 존재 표현
민화선 맹수 아닌 해학적 동물로 나타나
먼 나라 이야기 된 산군
일제강점기 뒤 6·25 전쟁거치며 사라져
사진작가 김신욱 작년 호랑이 연작 선봬
2021년 찍은 ‘불갑산호랑이’ 박제라 아쉬워
생생한 모습 다시 볼 수 있는 방법 고민

#호담국의 첫 번째 호랑이
어느새 음력 설이고 드디어 새로운 한 해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올해는 육십 간지 중 서른아홉 번째로 검은 호랑이를 의미하는 임인년(壬寅年)이다.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과거 각 지방에서 발견될 정도로 수가 많았으며 조선 세조 때는 창덕궁 후원에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다. 산맥으로 이어진 국토는 호랑이의 서식 조건과 잘 맞았고 수만년을 살게 했다. 사람들은 호랑이에게서 강인함과 용맹함을 보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영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로서의 호랑이는 설화와 전통 미술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내 왔다.
임인년을 맞아 국립민속박물관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민속상징사전: 호랑이’를 발간했다. 그 안에는 호랑이에 관한 다양한 설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한국구비문학대계 12지 관련 설화 중 호랑이 설화는 약 40%를 차지한다. 호랑이의 보은, 호랑이 잡은 기름 강아지, 호랑이 뱃속 구경 등 호랑이가 등장하는 익숙한 민담도 많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사학자이자 문인 최남선이 우리나라를 호랑이 이야기가 많은 나라, 호담국(虎談國)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통 미술에서도 자주 보이는 호랑이는 함께 등장하는 대상에 따라 그 의미가 구체화한다. 용과 등장하는 용호도(龍虎圖)에서는 용과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 용맹을 상징한다. 사찰에서 보이는 산신도(山申圖)에서는 산신령 옆에 자리 잡은 신앙적 존재로 표현된다. 민간에서 유행한 호작도(虎鵲圖)에서는 까치와 그려져 나쁜 기운을 쫓아내는 벽사(僻邪)의 기능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자주 그려진 호피도(虎皮圖)는 호랑이 가죽 무늬를 화면에 채워 공간을 장식하는 동시에 잡귀를 쫓는 용도를 지녔다.
‘호랑이(雲逋筆虎圖, 운포필호도)’는 조선 시대에 제작한 호랑이 회화다. 화면 속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앉아있다.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어깨 밑으로 내린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궁금증 가득 찬 눈빛으로 무언가 구경하는 모습인데 재미있는 장면인 듯하다. 꽃에 나비가 날아들거나 곤충끼리 싸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입은 웃고 있고 그 틈새로 이가 덧니같이 하나 튀어나와 우락부락해야 할 얼굴에 귀여움을 더한다. 호랑이의 특징인 가로줄 무늬를 표현한 잔 붓질이 털의 보드라운 느낌을 내 온순함을 전해준다.
이 작품은 호작도 같은 민화 속에서 호랑이의 생김새와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동그란 형태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보는 이가 해학적이며 친근한 느낌을 느끼도록 그려졌다.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맹수의 기운을 뽐내지 않는다. 그림 속에서 호랑이는 사실적 신체 구조와 입체적 묘사에 얽매이지 않은 채 표현됐다. 아카데믹한 형식을 익히지 않은 민중의 손에서 자유로움과 파격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민화의 특징이다.

#호담국의 두 번째 호랑이
그 많던 호랑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호담국이라는 명칭을 갖게 만들고 민화 속에 등장할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했던 호랑이는 이제 다 멀리 있다. 해외 뉴스에서 드물게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거나 해외와 마찬가지로 닿을 수 없는 동물원 우리 속에서만 접할 수 있다. 사진작가 김신욱은 이렇게 멀어진 호랑이를 추적하는 연작을 진행, 선보이는 중이다. 최근 이 연작으로 제12회 일우사진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신욱은 런던 골드스미스 순수 예술 학부를 졸업했으며 왕립예술학교에서 사진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부와 마찬가지로 순수 예술 박사 과정을 밟았으며 이를 통해 자기 주요 작업 매체인 사진을 예술이라는 넓은 맥락 안에서 쓰게 되었다. 그는 가시적 대상을 포착하고 명징하게 표현하는 카메라의 기능을 작업에서 반어적으로 활용한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들,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고 탐구하는 매체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문화인류학과 사회학 맥락의 자료 조사와 아카이브를 동반해 자기만의 작업 방식을 구축한다.
작가는 작업 초기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가진 민물고기를 관찰, 유형학적으로 기록하는 시도를 펼쳤다. 런던으로 유학 가 이방인으로 살며 인종 차별 등을 경험했고 작업 방향에 변화가 생겼다. 사람 없는 장소가 편해져 밤의 숲을 촬영한 ‘더 나이트 와치(The Night Watch)’(2011-2017) 연작을 진행했다. 작업에서 중요한 개념적 대상이었던 이방인을 들여다본 깊은 시선으로 그것을 만들어 낸 경계로 주제를 확장했다. 여행사 운전기사로 일하며 수없이 오간 히스로 공항을 촬영한 ‘언네임드 랜드: 에어포트 시티(Unnamed Land: Air Port City)’(2015-2020) 연작을 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업은 경계의 통로인 공항과 거기서 파생한 주변을 담아냈다.
김신욱은 최근 한국의 호랑이를 다루는 ‘한국 호랑이(The Korean Tiger)’(2021-)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우연히 호랑이에 관한 책을 접하며 시작한 이 작업은 마찬가지로 경계의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시베리아부터 진도까지 한반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던 호랑이들은 채 백 년이 되지 않는 시간 사이 사라졌다. 흔히 추측하듯 자연 환경적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그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정치, 사회적 배경이었다. 식민 시대 일본은 한국의 신화적 존재인 호랑이를 계획적으로 사냥해 개체 수를 줄였다. 이후 전쟁이 시작하며 한국의 호랑이들은 시베리아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길을 잃었다.

‘불갑산 호랑이’(2021)는 작가가 지난해 전남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속 호랑이는 입을 한껏 벌려 이를 드러내 기백을 보여주는 포즈를 취했다. 입안과 혀를 물들인 피 같은 붉은색은 용감함과 사나움도 보여준다. 하지만 포즈와 모양새에도 그 기운 대신 인위적인 느낌이 풍겨진다. 박제된 호랑이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 호랑이는 본래는 전남 영광 불갑산을 뛰어다녔겠으나 1908년 포획당했다. 한 일본인이 박제했고 유달초등학교 전신인 목포공립심상소학교에 기증해 학교 복도에 전시했다.
이 작업과 함께 작가가 모은 과거 한반도 호랑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커다란 간극에 빠지게 된다. 거기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질문과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 많던 호랑이는 정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나? 호랑이가 없는 한국의 생태계는 괜찮은 것일까? 호랑이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작가는 작업과 관련해 쓴 글 ‘한국 호랑이’를 다음 같이 마무리지어 이 질문들처럼 우리가 생각해 볼 거리를 던진다.
“어떤 대상이나 시점에 대한 비판 혹은 현재 한반도에 호랑이가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 내 특정 생물종의 절멸이 생태계 그리고 문화적으로 파생하는 나비효과와 그것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경계가 나뉘어있고, 그 사이의 이동이 제한되는 현재, 이 작업을 통해서 한국호랑이의 잊혀진 생태 통로를 상상하고 연결하며 우리의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은 무엇일까.”
임인년을 맞아 팬데믹에서 비롯한 고난을 호랑이의 기운으로 이겨내자는 새해 인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힘들고 지난한 지금의 우리에게 호랑이가 전해주는 것은 다만 기운뿐이 아닐 것이다. 호랑이는 익숙해진 나머지 잊어버린 물리적 경계와 거기에 얽힌 복잡한 상황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킨다. 그리고 작가의 반어적 작업 방식처럼 사실은 모든 땅 또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를 깨닫는 순간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는 경계 논의를 넘어 더 넓게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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