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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겨울도 아픈 기억도 빛 안에서 평안을 되찾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2-01-22 10:00:00 수정 : 2022-01-22 03: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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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반짝반짝 빛나는

댄 플래빈
형광등을 비스듬이 고정한 ‘1963년 5월25일의 대각선’
작품 속 ‘환영’ 아닌 현전하는 존재로서 빛 표현해
기성재료 활용, 작가의 개입 최소화… 예술가의 신화와 권위 탈피

김선희
크기와 재질에 따라 빛의 투과율이 달라지는 종이 활용
산란된 빛 속에서 사람들은 그 너머 각자의 목적을 봐
무언가 보고 있지만 실체를 찾을 수 없는 우리의 일상 표현
39점의 기념비 중 첫 번째 기념비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이 작품은 테이트미술관이 1971년에 구입해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댄 플래빈(1933-1996), ‘V.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반짝반짝 빛나는

이번 겨울 서울을 가장 밝게 비추고 있는 장소 중 한 곳은 중구 소재의 백화점인 듯싶다. 한 백화점 본점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건물 외벽을 화려한 루미나리에로 꾸몄다. 영화 ‘위대한 쇼맨’을 모티브로 삼아 서커스 콘셉트로 제작해 전에 없이 커다란 관심이 쏠렸다. 이 루미나리에와 함께 찍은 지인들의 사진이 SNS 피드에 하루에 하나씩은 꼭 등장했다. 호응 속에 기획한 팀의 팀장은 유명 TV 프로그램에 나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인기를 익히 알던 중 드디어 백화점 앞을 지날 일이 생겼다. 운이 좋게 신호에 걸려 기대보다 오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뗄 수 없던 것은 루미나리에보다 인도 위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잘 보이는 위치에 서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표정들에 나까지 웃음이 났다. 팬데믹(코로나 대유행) 등장 이후 어두운 곳에서의 칩거를 권하는 세상이 벌써 3년을 맞이한 지금. 빛이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것의 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빛을 탐구한 작가들의 작품이 일련으로 떠올랐다.

#댄 플래빈, V.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

댄 플래빈(Dan Flavin, 1933∼1996, 미국)은 국내 대중에도 널리 알려진 빛과 관련한 작가다. 2018년 롯데뮤지엄이 개관전으로 작가의 대형 개인전을 개최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품은 현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빛 :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에서 만나볼 수 있기도 하다. 런던 테이트미술관 소장품 110여 점을 ‘빛’이라는 주제로 선보이는 전시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모네(Claude Monet) 등의 근대 명화부터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올라푸르 엘리아손(Olafur Eliasson) 등의 동시대 미술까지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1960년대부터 빛을 활용해 명성을 알린 플래빈의 작품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댄 플래빈은 1933년 미국 뉴욕 퀸스 자메이카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가톨릭 학교에 다녔으며 청소년기에는 사제가 되는 공부를 했다. 그러나 사제의 꿈을 이루지는 않았고 형제들이 근무 중이던 미 공군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1953년 한국 오산의 제5공군 본부에서 기상병으로 일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한국에 머무른 젊은 시절 미술에 관심이 생겼고, 제대 이후 뉴욕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한스 호프만 스쿨 등을 거쳐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회화와 드로잉을 전공했다.

플래빈은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했다. 초반에는 추상 표현주의의 영향을 반영한 평면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작업실과 화방을 벗어나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물을 작품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형광등에 매력을 느껴 1963년에는 마트에서 산 형광등을 벽에 비스듬히 고정한 ‘1963년 5월 25일의 대각선(the diagonal of May 25, 1963·1963)’을 발표했다. 공산품을 구매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설치한 것은 낯설었지만 당대 새롭게 등장한 미술, 미니멀리즘의 특징이었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전통 미술에서 환영으로 존재하는 작품 속 존재가 아닌 현전하는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공장에서 제작한 기성의 재료를 사용해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예술가의 신화와 권위를 깼다.

 

‘V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monument’ for V. Tatlin)’는 플래빈이 형광등을 사용한 대표적 작업 중 하나다. 여기 각기 다른 길이의 일곱 개 형광등이 어둠 속에 있다. 초록빛을 뿜으며 드러나는 형태는 우뚝 솟은 탑을 떠올리게 만든다. 타틀린이 제작한 ‘제3 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를 닮은 것 같다. 형광등에서 퍼지는 빛은 작품이 형태를 넘어서 공간으로 확장하게 만든다. 플래빈은 이렇게 공간을 채우는 빛의 효과에서 숭고함을 보았다. 이전의 미술 작품이 숭고를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담은 것으로 다루었다면, 여기서 숭고는 근대의 산물이 가져온 일상 속의 새로운 숭고다.

러시아 구축주의는 기하학적이며 추상적인 형태로 미니멀리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플래빈은 구축주의 작가 중 특히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의 작업에 영감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만든 공학적 형태와 예술과 기술을 결합하려는 시도에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1964년부터 1990년 사이 타틀린에 대한 모조 기념비 연작을 39점이나 만들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따르면 작가는 ‘기념비(monument)’라는 단어를 형광등의 간소성과 기념비의 견고함 간의 불일치를 인식, 반쯤 농담으로 사용했다.

작품 근처를 지나가는 관람자와의 비교로 작품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대형 작업에서 퍼지는 빛은 전시장을 메운다. 김선희, ‘Light Lights l Wave of Light-curve’(2019) 설치 장면. 작가 제공

#김선희, 라이트 라이츠

김선희는 빛을 재료이자 주제로 다루는 작업을 하는 동시대 작가다. 중앙대학교 공예학과를 졸업했으며 크랜브룩 미술 아카데미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했다. 뉴욕 쿠퍼 유니언 주관으로 가버너스 아일랜드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국내에서는 룬트 갤러리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메르세데스 벤츠 파이낸셜 서비스 신진 작가상을 받았으며 2021년 화랑미술제 신진 작가전 ‘줌-인’에 선정, 참가하며 이목을 모은 바 있다.

작가는 공예를 전공해 일찍부터 목공예, 금속공예 작업을 하며 도자기와 직물 등을 다루었다. 손에 무엇인가가 닿는 느낌이 좋았고 그 순간 자기와 대상 사이 소통이 이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단순히 오브제로 완성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현상학적 의미로 넓어졌다. 이러한 의미를 반영한 작업을 모색하던 중 손이 만지는 수많은 표면 중 가장 최상위의 표면은 빛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진을 부전공으로 공부하며 익힌 빛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Light Lights l Wave of Light-curve’(2021)는 2021년 자문밖 아트 레지던시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아코디언의 주름상자 같은 형태가 수려한 모습으로 펼쳐져 눈길을 사로잡는다. 곡선과 직선이 교묘하게 어우러지고 그 사이로 빛이 퍼져 나온다. 빛은 강하거나 약하지만 서로 부딪치지 않으며 공간을 은은하게 함께 채운다. 어둠을 밝히는 그 장면은 댄 플래빈의 작품같이 일상 속 새로운 숭고로, 보는 이의 순간을 멈추어 마음을 매료시킨다. 그 안에 머물고 있으면 겨울의 시림도 기억의 아픔도 모두 평안해진다.

작품에서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형태를 만든 것은 종이다. 작가는 빛을 전사시키는 재료 중 유연성을 가진 종이를 작업에 자주 활용한다. 종이는 그 크기와 재질에 따라 빛의 투과율과 그 결에 차이를 가져온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대형 크기로 인해 심지에 감겨 있던 종이가 가지게 된 형태를 그대로 두었다. 가장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놓인 종이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할 수 있는 빛의 배치를 찾으려 노력했다. 완성된 작품을 두고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상에서 인지와 표현을 돕는 빛과 종이가 요란하게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서로의 물성을 지지하며 상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을 바라보며 느꼈던 평안함의 이유는 바로 여기서 기인했을 것이다.

작가는 빛에 관한 자기 생각을 다음같이 펼쳐 놓은 적도 있다. “우리는 빛을 통해 세상을 본다. 빛은 고유의 성질대로 끊임없이 흐르다 표면 어딘가에 부딪혀 파장을 산란시킨다. 산란된 빛은 일상에 산재하지만 우리는 주로 빛 너머 각자의 목적을 본다. 빛을 보지만, 빛을 보고 있지 않기도 한 이유다. 무언가 보고 있음에도 실체를 마주하기 어려운 나의 일상들과 꼭 닮아 있기도 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모호한, 실체를 마주하기 어려운 일상은 어쩌면 작가뿐 아니라 우리가 모두 마주한 매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빛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우리를 비추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반짝이던 백화점 앞 루미나리에처럼 발견되어 위로가 되길 바라며.


큐레이터 김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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