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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시인들의 나라에서 살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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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12-31 22:44:24 수정 : 2022-01-04 14: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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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만 나오는 다큐 영화 한 편
주민들 미동 없이 보게 한 힘은
시인도 시집도 많은 대한민국
우리 맘속 내재된 시심 아닐까

전 세계 국가 가운데 대한민국에만 있는 것은 뭘까. 내가 보기에는 인구 대비 대한민국만큼 시인이 많은 나라는 없는 것 같다. 신년벽두에 각 신문사 공모 신춘문예를 통해 50명에 이르는 시인이 한꺼번에 탄생한다. 중앙지와 지방지는 물론 요즘엔 인터넷신문에서도 문학작품을 공모하고 있다. 문예지는 또 얼마나 많은가. 100개가 훨씬 넘는데 거의 신인상 공모를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시집이 많이 출간되는 나라는 지구상 대한민국밖에 없다. 출판사마다 시리즈로 번호를 붙여서 내고 있다. 문학과지성사의 ‘문지시선’이 500호 기념호를 낸 것이 2017년 7월이었고, 창비사의 ‘창비시선’이 400호 기념호를 낸 것이 2016년 7월이다. 시집 시리즈가 100권 넘게 진행되고 있는 곳을 세어보니 15군데가 넘는다. 시인도 많고 시집도 많으니 ‘시인공화국’이라 일컫지 않을 수 없다.

이승하 중앙대 교수·시인

외국 어느 나라를 가도 서점에서 시집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서점의 판매원에게 물어보면 어깨를 쭈뼛 올리면서 양손을 펼쳐 보인다. 간혹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가보면 10여 권 시집이 꽂혀 있다. 그런데 그 시대, 그 나라 사람의 시집이 아니라 샹송으로 많이 만들어진 프랑스 자크 프레베르의 시집, 스페인 내란 때 총살당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집, 10대 천재로 유명한 아르튀르 랭보의 시집이 자국의 번역본으로 출간돼 꽂혀 있다. 시집이 워낙 안 팔리다보니 외국의 시집은 대개 자비출판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 나라의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시집의 경우 쇄를 거듭해 찍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21세기로 접어든 이후 노벨문학상의 시인 수상자는 단 2명으로 1명은 미국의 밥 딜런이고, 또 1명은 미국의 루이스 글릭이다. 서구에서는 노벨문학상마저 시인을 홀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추리를 해본다. 과거제가 고려조 광종 때인 958년에 시행되기 시작해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됐으니 1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문과는 명경과와 제술과 시험으로 나뉜다. 명경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력을 보았고, 제술과는 문장을 짓고 서술하는 능력을 보았다. 선비들은 중국의 가장 오랜 시가집 ‘시경’의 시를 외우고, 문장력을 키웠다. 지금도 시제를 주고 백일장을 실시하는 문학단체가 많은데 그 옛날 과거제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시대마다 대표적 문학 장르가 있었다. 통일신라 시대의 향가, 고려 시대의 고려가요, 조선 시대의 한시와 시조 등과 시대를 관통하는 민요와 무가가 모두 시였다. 한국 가요사도 보자. 노랫말이 다 시가 아닌가.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불효자는 웁니다’ ‘테스형’ ‘히어로’ 등이 시다. 방탄소년단(BTS)의 노래 가운데도 밥 딜런의 시만큼 좋은 것이 꽤 있다.

최근 서울 노원문인협회에서는 노원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 구민을 대상으로 영화 한 편을 상영했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띄엄띄엄 떨어져 앉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이 왔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의 인터뷰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놀랍게도 한 명도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영화의 제목은 ‘시인들의 창’, 시인들만 등장하는 다큐 영화였다. 줄거리도 없고 내레이터도 없고 대사도 없는 영화였다. 시인들이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예버덩 문학의 집’에서 노트북에 시를 쓰는 장면을 위주로 찍었다. 시인들이 주천강을 바라보며, 산책을 하고, 명상에 잠기고, 시를 쓴다. 그 뒷모습을 주로 찍었다. 나도 몇몇 시인과 초청받아 참석했는데 영화를 보는 순간순간이 나를 사색의 세계로 인도했다.

영화적 재미가 전무한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한 힘,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까지 끝까지 보게 한 끈기는 뭘까. 바로 우리 마음속에 내재돼 있는 시심이 아닐까. 언어의 오묘한 세계에서는 세상사가 몇 줄로 압축되고 경험이 상상의 날개를 펴기 때문이다. 시가 꿈꾸는 세계에서는 번잡한 일상사도, 팬데믹의 위기도, 정치판의 소음도 없다. 새해에는 또 어떤 시인이 등장할까.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을 꿈에 부풀어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승하 중앙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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