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년차다. 지금까지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고부갈등은 딱히 없었다. ‘내 며느리’, ‘내 어머님’으로 묶여 잘 지내는 고부 사이는 정말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주변의 가슴 답답한 고부갈등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게 된다. 하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에게 갈등 요소 자체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런 갈등의 여지가 생기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이 아들이자 남편으로서 내 역할이지 싶다.
그동안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주로 ‘전략적 모호성’을 취했다. 전략적 모호성은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이 아닌 양국 사이에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모호한 전략을 편다는 의미로 쓰이는 용어다. 한국이 ‘동맹’인 미국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인 중국 사이에서 펴는 외교정책으로 자주 거론된다. 기자도 ‘천륜지간’인 어머니와 ‘애정 기반 평생 동반자 관계’인 아내 사이에서 결정이 필요할 때, 이 전략을 썼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고부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명절 ‘차례’ 문제에서 그랬다. 친정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았던 아내는 명절 때마다 시댁에 가서 차례상을 준비하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차례의 의미를 사실 모르겠다”, “명절 당일 오전에 왜 시댁에만 있어야 하나”, “친정 가족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거냐”고 묻는 아내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다. “나중엔 집안 명절 문화를 바꿔보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만 되뇌었다.
어머니에게는 아내의 생각을 전하지 않았다. “총각 시절에는 이렇게 힘든 차례 준비를 하나도 돕지 못해 죄송하다”고 뒤늦은 ‘고해성사’만 했다. 어머니는 급변한 아들이 섭섭할 만도 했지만, 되레 “며느리가 생기니 아들이 주방에서 일을 한다”며 좋아하셨다. 나는 나대로 어머니와 아내의 옆에서 명절 준비를 함께 하는 모습으로 전략적 모호성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전략적 모호성이 유효할까.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의 논문에서 의미심장한 문구를 봤다. “미·중의 전략적 경쟁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현안에 대한 임기응변식 대응만이 나타난다면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향후 미·중 모두로부터의 압력이 더욱 거세질 수 있다. 또한 미·중 모두로부터 전략적 불신을 당할 수 있어 장기적으로 더욱 큰 국익의 손실로 나타날 수 있다.”
미·중 갈등을 고부관계로 치환하는 것이 온당치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고부 사이에서 중간자적인 역할을 하는 입장에선 꼭 들어맞는 조언 같았다. 지금까지 전략적 모호성으로 순간을 모면한 것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설 명절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친척들과 명절 차례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눠볼까 한다. 모호하지 않고 명료하게. 무엇보다 명절 차례 준비를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대결 구도로 보는 프레임부터 바꿔야 할 것 같다. 이 문제는 어머니와 아내 중 누구를 선택하는 양자택일 자체가 아니다. 모두가 합당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을 고민하기 싫어 두루뭉술 매 명절만 넘기고 보자는 술책은 이제 끝낼 때가 됐다. 이번 칼럼이 ‘전략적 명료성’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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