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랜드 참사 당시 유가족이 자신의 딸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와 당시의 참담했던 심정을 전했다.
지난 9일 오후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많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씨랜드 참사 당시를 조명했다.
1999년 6월30일 이른 오전,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씨랜드 수련원에서 자고 있던 이들은 소망유치원 42명, 군포 예그린유치원 원생 65명, 서울 공릉미술학원 원생 132명, 부천 열린 유치원 원생 99명, 이월드 영어학원 운생 74명, 화성 마도 초등학교 학생 42명등 497명의 어린이와 인솔교사 47명 등 총 550명이었다.
이상학 씨는 이날 다급한 목소리로 텔레비전을 켜보라는 막내 처제의 전화를 받았다고.
TV화면 속에는 커다란 불에 휩싸인 건물의 모습이 보였고 그곳은 이상학 씨의 7살 딸 세라가 생애 첫 캠프를 떠난 곳이었다.

당시 불이 난 후 화재경보기와 소화기는 작동하지 않았으며, 신고 후 20분이 지나서야 소방차가 도착하는 등 그날의 참사가 일어나기까지의 많은 퍼즐 조각이 펼쳐졌다. 당시 아이들의 곁에는 선생님마저 없던 것으로 밝혀졌다.
1988년 초부터 영업을 시작한 수련원의 불이 난 C동은 콘크리트 건물 위쪽으로 2~3층에 컨테이너 52개를 쌓아져 있는 곳이었다. 외벽은 흰색 목재, 지붕은 샌드위치 패널로 마감돼 불에 연소하기 쉬운 구조였다.
더군다나 컨테이너가 저가 제품인 탓에 열정도성이 강하고 이음새에는 실리콘을 바르는 등 졸속 건물이었지만 당시 화성군청 측은 현장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허가를 내준 것으로 알려져 논란을 더욱 키웠다.
특히 연소되기 쉬운 자재로 만들어진 C동은 단 20분 만에 화마에 휩싸였다. 이 C동에 위치한 301호에는 소망유치원 7살 햇님 반 아이들이 있었고, 이곳에는 세라도 있었다. 당시 사건 현장에는 불에 탄 아이들의 시체가 즐비해 충격을 주었다.
이상학 씨는 사망자 명단에서 세라의 이름을 발견하고 국과수로 달려갔으나 시신을 볼 수 없도록 만류했다. 그러나 이상학 씨는 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고, 당시에 대해 그는 “딸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세라의 다리에 붙은 타다 남은 세일러문 스티커 때문”이라고 참담했던 당시를 전해 보는 이들을 먹먹하게 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