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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로 정권 잡았지만… 퇴임 후 내란죄·정치군인 오명

입력 : 2021-11-24 06:00:00 수정 : 2021-11-24 09: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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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구하다 지원한 육사 추가 합격
노태우와 동기로 재회… 돈독한 사이로

박정희 전 대통령 눈에 들어 출세 가도
사재 털어가며 동기·후배 진급에 사활
군내 자기 사람 키우며 파벌문화 조성

盧 후계자 세웠지만 퇴임 후 배신감 토로
1979년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관련 발표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23일 세상을 떠난 전두환 전 대통령은 33년 전 이날 제5공화국의 비리·과오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한 뒤 백담사를 향했다. 그는 ‘움막집 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5·16쿠데타와 10·26사태, 12·12쿠데타 등 현대사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권력 핵심으로 거듭나 대통령까지 올랐다.

전 전 대통령은 1931년 1월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총 3남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5살 때 대구에 온 전 전 대통령은 8살 때 부친을 따라 만주에 가야만 했다. 전 전 대통령의 부친 전상우씨가 평소 자신과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던 일본인 순사부장을 벼랑으로 밀어버리면서 온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달아났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처음 학교에 입학한 전 전 대통령은 1년 뒤 부친을 따라 귀국해 대구 외곽의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해 “당시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하여 집이 아닌 움막집에서 살았는데 동네 사람들은 나를 ‘움막집의 아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소문난 운동광… 가난 때문에 결혼 물 건너갈 뻔

1947년 뒤늦게 소학교를 졸업한 전 전 대통령은 5년제인 대구공업중학교(현 대구공고)에 입학했다. 전 전 대통령은 달성공원 변두리에 있는 집에서 학교까지는 약 10㎞ 정도의 거리를 매일 걸어서 왕복했지만, 하루도 출석을 거르거나 지각하는 일 없이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전 전 대통령은 신문 배달과 각종 일을 하느라 학업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했지만, 축구부 골키퍼로 활약하는 등 운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교우관계도 활발했으며 고(故)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큰형인 고(故) 이맹희 전 CJ 명예회장과 ‘죽마고우’로 지냈다. 당시 국수공장을 하던 이 전 명예회장의 집에서 가족들이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한 살 어린 노태우 전 대통령도 대구공업중학교에서 전 전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다.

1979년 12·12쿠데타 이후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하는 신군부 세력. 앞줄 왼쪽 넷번째가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전 전 대통령은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일자리를 구하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모집공고를 보고 육사에 지원했다. 공부가 충분치 않아 처음에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한 달 뒤 합격자 미등록으로 결원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가까스로 11기 생도로 1951년 육사에 입학하게 됐다.

육사 11기로 입학한 228명 중 중도 탈락을 제외한 156명이 졸업했으며 전 전 대통령은 하위권인 126등의 성적을 기록했다.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육사 생도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 체육시간이 없었으면 난 질식했을 거야. 그래서 축구부에 들어가 골키퍼를 하면서 소리소리 지르고 공도 뻥뻥 찼다”며 “결국 4년을 그렇게 보내며 소대장 생도 한 번 못 해보고 졸업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지. 공부는 못했지만, 군인으로서는 1등을 하겠다고”라고 밝혔다.

1980년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연합뉴스

◆5·16쿠데타가 만든 출세의 기회… ‘하나회’로 쿠데타 성공

1955년 육사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전 전 대통령은 1959년 1월 24일 부인 이순자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씨는 예비역 장성 출신인 이규동 전 대한노인회 회장의 큰딸로 전 전 대통령이 육사 2학년 생도시절 육사 참모장이던 이 전 회장을 만나러 집을 찾았다가 처음 만나게 됐다. 전 전 대통령은 임관 후 본격적으로 이씨와 교제를 시작했지만 전 전 대통령은 “초급 장교의 한 달 봉급이 쌀 한 말을 살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된다”, “나하고 결혼하면 고생할 것이 뻔한데 사랑하는 사람을 고생시킬 수 없다”며 이씨에게 헤어지자고 통보했다. 사정을 알게 된 이씨의 설득으로 전 전 대통령은 양가의 허락을 얻어 결혼하게 됐다.

196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쿠데타는 전 전 대통령에게 출세라는 ‘권력의 동아줄’을 잡는 기회가 됐다. 전 전 대통령은 “강영훈 육사 교장이 생도들의 혁명지지 행진을 막아 혁명을 망쳐놓고 있다”며 1960년 5월 18일 육사 생도의 군부 5·16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이끌어 박 전 대통령의 눈에 띄게 된다. 소장이던 박 전 대통령이 당시 대위이던 전 전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지만 “군(軍)에서 각하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사양했으나 오히려 이러한 점이 박 전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67년 청와대 경내와 외곽을 경비하는 수경사 30대대장으로 근무할 때는 산책 나온 박 전 대통령에게 목이 터지도록 “충성”이라고 경례 구호를 외치는 등 절대적인 충성을 보였다. 박 전 대통령은 권투광인 전 전 대통령의 권투 해설을 들으며 TV로 권투 중계를 볼 만큼 전 전 대통령을 신뢰했다.

전 전 대통령이 1963년 노 전 대통령을 비롯한 김복동·최성택·정호용 등 육사 11기와 만든 군내 사조직 ‘하나회’는 향후 12·12쿠데타의 주력이 되면서 정치적 자산이 됐다. 전 전 대통령은 동기와 후배의 진급을 위해 사재를 털어가며 인사 담당자를 찾아가 진급운동을 하면서 군내 자기 사람을 키워왔다.

1988년 백담사에서 부인 이순자씨와 경내를 둘러보는 모습. 연합뉴스

‘쓰리(3) 허(허화평·허문도·허삼수)와 장세동’으로 대표되는 제5공화국 주축들도 하나회 출신이다. ‘5공의 설계자’로 불린 허화평씨는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12·12쿠데타를 기획·설계했다. 허삼수씨는 허화평씨와 육사 17기 동기로 12·12쿠데타 당시 보안사령관 인사처장으로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연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장세동씨는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을 맡아 12·12쿠데타 당시 직속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체포했다.

전 전 대통령은 월남전 교전 중에서 크게 다친 장세동씨의 무용담을 전해 듣고 안면도 없는 상황에서 먼저 찾아가 격려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전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전남 고흥 출신의 장씨는 영남 출신이 주류인 하나회에 가입, 군에서 승승장구했다. 장씨는 1988년 5공 청문회장에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차라리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고 말했다.

공식 석상 마지막 모습 전두환 전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8월 9일 광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사자명예훼손 혐의 항소심 재판에 출석했다가 25분 만에 건강 이상을 호소하며 퇴청하고 있다. 공식 석상에 노출된 마지막 모습이다. 광주=연합뉴스

◆피할 수 없었던 5공 청산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을 후계자로 세우고 물러났지만 ‘5공 청산’의 시대적 요구를 피할 수 없었다. 퇴임한 지 9개월 만인 1988년 11월 강원 인제군의 백담사로 사실상 유배를 간 전 전 대통령은 “상당히 무리해서 노태우 당선에 기여했는데,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후임자가 선임자를 죽이는 것이 깨끗하다”며 깊은 배신감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199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내란·반란수괴죄 등의 혐의로 기소되면서 법정에서 다시 마주쳤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전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을, 노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의 중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구치소에 수감됐던 두 전직 대통령은 같은 법정에서 처음 만나 “구치소에서 계란 후라이가 나오느냐”(전두환), “안 나온다”(노태우)고 말한 일화가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사면을 건의하면서 두 전직 대통령은 출소하게 됐다. 2014년 전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병문안을 간 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5·18은 폭동” “전 재산 29만원밖에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생전 논란의 발언을 다수 남겼다.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정당화하는 듯한 발언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국가의 추징금 집행에는 “예금 자산은 29만원밖에 없다”고 말해 숱한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전 전 대통령 발언 중 가장 큰 논란을 빚은 건 단연 5·18 민주화운동 관련 언급이다. 전 전 대통령은 2003년 SBS와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면서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2017년 출간된 회고록에서 “당시 국군에 의한 학살이나 발포명령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89년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에서도 그는 “자신은 관여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며 자위권 행사라는 인식을 보였다.

 

회고록에서 전 전 대통령은 군 진압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겨냥,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 회고록을 놓고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출판 금지소송을 냈고, 광주지방법원은 사실과 다른 서술을 했다며 출판을 금지했다.

 

12·12 군사반란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은 청문회와 회고록 등에서 쿠데타가 아니며 우발적 사건이라는 입장을 보이면서 ‘내란’이라고 규정했던 대법원 판결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1995년 12월 검찰의 소환을 거부하며 연희동 자택 앞에서 발표했던 ‘골목성명’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을 겨냥해 “갑자기 저를 내란의 수괴로 지목하며 과거 역사를 전면 부정하는데 이러한 내란 세력과 야합한 김 대통령 자신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이외에도 전 전 대통령은 1996년 비자금 사건 공판 당시 “돈을 받은 건 사실이다”면서도 “내가 돈을 받지 않으니 기업인들이 되레 불안을 느꼈다. 기업인들은 내게 정치자금을 냄으로써 정치 안정에 기여하는 보람을 느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고, 2008년 총선 투표 뒤엔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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