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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 아내 살해 혐의 무죄 남편의 소송, 엇갈린 판결 왜

입력 : 2021-11-21 19:30:00 수정 : 2021-11-21 21:3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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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수준’ 보험금 지급 여부 갈랐다

캄보디아 출신 妻 교통사고 사망
33개 보험 가입… 총 수령액 95억

“한국살이 초기… 약관 이해 못 해”
미래에셋 소송선 “계약 무효” 패소

“원동기 면허 따… 의사소통 가능”
삼성생명 땐 “보험금 지급” 승소
지난 2014년 수사진이 ‘보험금 95억’ 만삭 아내 사망 교통사고를 조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망인(피보험자)은 이 사건 각 보험계약 체결 시 그 내용을 이해할 정도의 한국어 구사능력이 있었던 점 등에 비춰 각 보험계약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보험계약 청약서에 자필로 서명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10월2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7부)

 

“망인은 이 사건 각 보험계약 체결 시 한국어 (구사)능력이 부족했던 점 등을 종합하면 각 보험계약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11월17일, 〃 민사36부)

 

보험금을 타내려고 교통사고를 가장해 만삭인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가 무죄가 확정된 남편이 보험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금 지급 청구소송에서 같은 법원의 두 재판부가 정반대의 판결을 하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숨진 외국인 아내의 보험 계약체결 당시 ‘한국어 능력’ 정도를 두 재판부가 어떻게 봤는지에 따라 상반된 결과가 나왔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37부(재판장 박석근)는 A씨가 삼성생명보험을 상대로 낸 보험금(약 32억원) 청구소송에서 지난달 28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반면 같은 법원 민사36부(재판장 황순현)는 A씨가 미래에셋생명보험을 상대로 낸 보험금(약 30억원) 청구소송에서 이달 17일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앞서 A씨는 2014년 8월23일 새벽 승합차를 몰고 가다 비상정차 중이었던 화물차를 들이받았고, 이 사고로 조수석에 타고 있던 임신 7개월의 아내 B씨가 사망했다. A씨는 졸음운전으로 사고가 났다고 항변했지만 검찰은 보험금을 노린 고의 사망사고로 결론짓고 재판에 넘겼다. 1심(무죄)과 2심(유죄) 판결도 엇갈렸으나 2017년 대법원은 A씨의 살해 혐의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 취지로 파기했다.

 

A씨는 1심 무죄 판결 후인 2016년 8월 삼성생명과 미래에셋생명, 교보생명을 상대로 아내의 사망보험금 청구소송을 냈다. 이들 보험사와 캄보디아인 아내를 피보험자로 한 33개의 보험계약을 체결했던 A씨가 받을 수 있는 보험금은 약 95억원에 달했다. 이 소송은 형사재판 결과를 기다리며 중단됐다가 올해 재상고심에서 A씨의 무죄가 확정된 후 재개됐다. 이 때문에 민사재판에선 상법 제731조(1항)에 따라 A씨가 아내 명의 보험계약을 체결할 때 B씨가 각 계약 내용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동의했는지가 쟁점이 됐다. 타인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하는 보험계약의 경우 제한없이 허용하면 피보험자 살해 위험성 등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돼 사전에 피보험자의 ‘진정한 의사’를 통한 동의가 필수적이다. 그러지 않으면 해당 보험계약은 무효가 된다.

 

이에 보험사들은 2008년 국제결혼으로 처음 한국에 온 B씨가 2009년, 2011년 체결된 보험계약서 등에 기재된 어려운 용어나 계약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을 리가 없다며 ‘계약 무효’를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민사37부는 B씨가 계약 내용과 의미를 알 수 있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B씨가 혼인 후 꾸준히 한국어를 공부했고 삼성생명과의 보험계약은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경과한 2009년 9월에 이어 2011년 2월 체결된 점, 당시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보험설계사 증언 등을 들며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B씨가 2012년 3월 원동기장치자전거 면허 필기시험에 합격한 점도 그러한 판단 근거로 제시했다.

 

반면, 민사36부는 B씨가 미래에셋과 2009년 11월, 2011년 9월 체결한 보험약관 등 계약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2011년 9월 B씨를 진료한 산부인과 의사와 보험설계사들의 진술 등을 종합해도 B씨는 당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한국어에 미숙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어 “원동기장치자전거 면허 필기시험의 경우 문제은행 방식이라 단순 암기로 충분히 통과할 수 있다”는 점 등 B씨의 한국어 의사소통 한계를 분명히 했다. 다만 재판부는 “한국어 능력이 부족하고 위험에 처해질 수 있는 사람(외국인)을 피보험자로 한 거액의 생명보험계약을 체결할 때는 모국어로 된 약관을 제시하거나 통역을 하는 등 진정한 동의 의사를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보험사의 잘못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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