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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고의 시간으로 다져진 음악가의 내면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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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11-20 01:00:00 수정 : 2021-11-19 0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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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정희와 피아니스트 백건우 부부를 위한 사진 촬영을 끝마친 후 이진수 사진작가(왼쪽)와 저자 이지영이 노부부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7년 당시 윤정희씨는 이미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글항아리 제공

스물한살에 세계 정상에 오른 피아니스트 조성진에게 다가오는 삼십 대는 어떤 의미일까. 건반의 구도자 백건우에게 젊은 날 파리에서 불꽃 같은 사랑으로 만나 평생을 함께한 아내 윤정희는 어떤 존재일까.

 

무수한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다져진 예술가 내면은 대중에게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단편적인 인터뷰로는 근황을 알 거나 최근 연주, 앨범 녹음에 대한 심경을 다소나마 알 수 있는 선에서 그칠 때가 많다. 다행히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후 20여년간 클래식 무대를 기획하며 아티스트 행보를 지켜본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클럽발코니 편집장이 그들이 필생의 시간을 쌓아 얻은 음악의 언어를 해설하는 책을 펴냈다. 신간 ’음악, 당신에게 무엇입니까’는 백건우, 정경화, 조성진, 임동혁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클래식 스타 내면을 포착한다. 음악캠프에 참가한 초등학생 김선욱, 음악잡지사를 찾아온 중학생 손열음 등에게서 발산하는 특별한 재능을 목격하며 클래식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오랜 시간 이들과 함께 일하며 쌓은 신뢰 속에 나눈 대화, 인터뷰 등을 통해 좀처럼 듣기 힘든 클래식 아티스트 7명과 또 다른 아티스트 7명, 그들 내면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전한다. 

 

◆“개성은 자연스러움에서 나와요.”

 

2021년 현재, 조성진은 20대 피아니스트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행보를 걷고 있다. 21세 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도이체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하고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와 연이어 협연하며 최고의 무대를 만들고 있다. 전설적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플레트뇨프 등이 든든한 멘토이자 후원자다. 그럼에도 조성진은 “선입견과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깨고 싶은 선입견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 인종차별까지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고 쉽게 판단해온 것이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동양인은 감정이 없다. 기계적이다. 연습을 너무 많이 한다 등등.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아직도 인터뷰하면서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동양인 아티스트에 대한 편견은 널리 퍼진 인종차별이다. 최근에도 바이올린 거장 핀커스 주커만이 "한국인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그건 그들의 DNA에 없다"며 인종비하 발언을 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조성진은 “연습은 동양인보다 러시아 사람들이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게 꼭 중요할까”라고 반문했다. 자신의 연습시간은 하루 4시간을 절대 넘기지 않는다. 그 이상은 효율이 떨어지고 노동이다. 

 

조성진은 ‘조성진다운 연주’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는다. “요즘 저는 개성 찾는 건 접었어요. 작품에 대해 저 나름대로 생각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런 연주에 혼란스러워하는 관객과 관계자들을 봤어요. 더 난감한 것은 남들과 다르게 치고, 이상하게 혹은 특이하게 치는 걸 흔히 개성이라고 여기는 점이에요. 개성은 자연스러움 속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악보를 존경하고 최대한 존중하면서 작곡가 메모를 쓴 이유를 곱씹는 게 조성진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다.

음악,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 이지영 / 글항아리 / 1만9800원

여전히 청춘일 수 없는 30대에 대해선 생각이 많아진다.  “20대가 끝나는 2023년까지는 걱정 없이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3년 후까지 연주 일정도 잡혀있고요. 문제는 30대인데 애매한 나이에요. 새 연주자들이 계속 등장할 테지만, 30대는 거장도 아니고 애매하죠. 생각이 많아지겠죠. 그때 뭘 해야겠다는 걸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어요. 여러 생각이 있지만 프로젝트 연주회, 그러니까 브람스,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를 해보고 싶어요.”

 

혼자 하는 악기라서 피아노가 좋다는 조성진, 실내악도 협주곡도 좋지만 독주회가 제일 편하다. 일상에 대해선 5명 이상 모이는 자리에 가면 힘들다고 한다. “주변 사람이 20명을 넘지 않을 거예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백 퍼센트 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아요.” 한 달 매일 본 사람보다 3년 동안 다섯번 본 사람이 있다면 그를 더 가깝다고 느낄 정도로 음악이나 인간관계에서 시간을 중시하는 그는 음식도 마찬가지다. “사골, 와인, 된장. 뭔가 오랜 시간 끓이고 익히고 숙성시켜서 맛이 우러나오는 음식을 정말 좋아해요.”

 

◆“베토벤, 그의 사랑은 우직합니다.”

 

파리에서 사랑에 빠지고, 납북위기를 함께 겪기도 했던 건반의 구도자 백건우와 부인 윤정희의 사랑은 당대의 로맨스였다. 40년 넘도록 금슬좋았던 부부는 지금 노후에 찾아온 치매라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오래전부터 노부부와 인연을 이어온 저자는 늘 다정한 예술가 부부의 대화에 때로는 “아직도 뭐가 그리 재밌느냐”고 끼어들었다. 평소 과묵한 백건우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전부 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여기 밑에서부터 저기 위에까지 다 좋아!” 윤정희는 남편이 하는 말 중에 “나는 당신이 점점 더 좋아져”라는 말에 가장 감동한다고 했다. 대중에겐 최근에야 알려진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발병은 꽤 오래전이었다. 2016년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 치매를 겪는 할머니 ‘미자’를 연기할 때 이미 자신의 기억을 잃어가던 중이었다. 기억을 잃어가는 부인과 그 남편에게 행복한 기억을 담은 기사와 사진을 선물해주려는 주변의 배려로 2017년 특별한 사진 촬영이 준비됐다. 촬영장에 나타난 윤정희는 이미 많은 기억을 잃은 상태여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던 이들에게도 충격과 큰 슬픔이었다. 그러나 반나절 이어진 촬영에서 윤정희를 대하는 백건우 모습은 큰 인상을 남겼다. 몇번씩 같은 질문을 하는 아내에게 늘 처음 듣는다는 듯 매번 자상하게 대답하는 자연스러운 태도는 무게감 있었고 주변도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작가는 고민 끝에 부인을 바라보는 백건우의 시선을 기록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평소처럼 평온해 보이는 피아니스트의 모습 뒤에는 어떤 파고가 있을까. 2019년 백건우가 새 앨범을 출시해서 한국에 이전과 달리 혼자 왔을 때 부인의 안부를 묻자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표정이었지만, 입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을 따름이었다. 

 

“베토벤이 제게 알려준 게 사랑이에요. 그의 사랑은 우직합니다. 사랑은 순간의 떨림과 감동에서 시작할 수 있겠지만 요구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 항상 믿고 그의 편이 되어주는 것으로 지속됩니다. 지치는 순간이 오더라도 떠나지 않고 관계에 익숙해져도 다른 곳을 돌아보지 않는 것, 힘든 시기를 겪더라도 조용히 옆에 있어 믿음을 주는 것이죠. 그런 음악가의 작품을 통해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 일상도 영향을 받습니다. 작곡가가 부어준 큰 힘, 우직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힘을 믿으면, 내 주변의 사랑이나 관계의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얻고 더 다가가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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