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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왕비 죽여. 너무 쉬웠다” 명성왕후 암살 후 발송된 日 외교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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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11-16 14:10:48 수정 : 2021-11-17 09:4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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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명성황후 추모제 모습

 

“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

 

16일 아사히신문은 명성황후 암살사건으로 불리는 ‘을미사변’ 당시 이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보낸 서한을 통해 당시의 상황이 전해졌다고 밝혔다. 이는 사건의 상세한 내용을 밝히는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암살에 가담한 일원인 현지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는 암살 다음 날인 1895년 10월9일 고향에 사는 친구이자 한학자 다케이시 데이쇼(武石貞松)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는 총 8통의 편지 가운데 여섯 번째로, 궁 안 진입과정과 시해 당시의 행동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해당 편지는 나고야시에 거주하는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 씨가 편지를 고물 시장에서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서한에 “진입은 미리 담당한 대로”, “담을 넘어 (중략) 겨우 오쿠코텐(귀족 집 안쪽에 있는 건물·침소)에 도달해 왕비를 시행했다”, “생각 외로 너무 쉬워서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고 적었다.

 

아사히신문은 나카쓰카 아키라 나라여대 명예교수의 말을 빌려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며 “일본이 한반도에서 무엇을 했는가, 사건 후 120여 년이 지나 당사자가 쓴 1차 사료가 나온 의미는 크다. 이들이 현지인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신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를 검토한 재일 역사학자이자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을 집필한 김문자씨는 “현역 외교관이 부임지의 왕비를 시해하는 데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서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며 “아직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밝히는 열쇠가 되는,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말했다.

 

한편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櫻)의 지휘 아래 일본 주요 무력이 조선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고종의 왕후 중전 민씨)를 살해한 사건이다.

 

그러나 일본에 유리하도록 불평등하게 설정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으로 인해 조선의 재판권은 일본인 실행 그룹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사건 다음 해 1월 일본 육군 장교 8명은 군법회의에서 무죄로 결론이 났으며, 미우라와 호리구치 등 48명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면소·석방됐다.


강소영 온라인 뉴스 기자 writerk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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