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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함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내 문제 아닌 모두의 문제라고 깨닫는 이야기 쓰고 싶었죠“

입력 : 2021-11-02 20:19:08 수정 : 2021-11-02 2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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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떠나온 세계’ 펴낸 소설가 김초엽

지난 2년 동안 쓴 7편의 단편 수록
“처음 발단된 아이디어는 음식 금기
지구와 인간의 관계로 확장해 풀어내”

소중한 기억이 지워지는 인지 공간
복제인간·기계 리더와 우정도 그려
다른 정체성 가진 사람과 관계 성찰
자신의 SF소설 장점으로 “잘 읽히는 것”을 꼽은 김초엽은 “발표한 작품이 걸작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많이 써서 그 중에 좋은 작품이 몇 개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문·이과로 나누는 현재의 교육 체계는 21세기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지식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방법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남정탁 기자

…거의 모든 문명이나 종교는 특정한 음식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있다. 예를 들면, 이란이나 이라크, 파키스탄 등 이슬람 문명권은 돼지고기와 그 제품을 먹는 것을 금하고, 인도의 힌두교도나 시크교도들은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

문명과 종교의 금기 현상을 다룬 책을 읽으면서, 소설가 김초엽은 문뜩 한 생각이 피어올라서 급하게 메모했다. ‘음식의 금기 현상을 다루면서, 그 금기의 원인을 SF적으로 해석해 보자!’

음식에 대한 금기 문제를 SF단편으로 쓰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다시 지구와 인간 간의 은유로까지 확장해 보고 싶었다. 인간이 지구의 일에 너무 개입해 버렸고, 지구와 복잡한 공생관계가 돼버린 시대를 의미하는 ‘인류세’라는 개념도 있지 않는가.

행성 ‘벨라타’의 사제 ‘노아’가 이 행성을 탐사하고 떠난 지구인 ‘이정’에게 띄우는 편지 형식으로 지구와 인간의 공존 문제를 풀어낸 단편 ‘오래된 협약’이 탄생했다. 탐사대원 이정을 맞아 벨라타의 이곳저곳을 소개하는 노아, 탐사 끝에 벨라타인의 수명 단축에 영향을 미치는 ‘오브’를 먹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이정. 서른도 되기 전에 일종의 정신병을 앓다가 죽게 될 노아는 이정이 떠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오브와 벨라타인 사이에 존재해온 오래된 협약에 대해 고백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이 행성의 시간을 잠시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지요… 먼 우주에서 온 작은 존재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떼어 주기로 결정하는 마음이, 이 잠든 행성 벨라타 전체에 깃들어 있었어요. 저는 눈을 감고 그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오래된 협약을, 수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지키고 있는 존재들을.”(224∼225쪽)

‘2021년 올해의 문제소설’로 뽑힌 ‘오래된 협약’을 비롯해 지난 2년간 쓴 7편의 단편을 수록한 김초엽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한겨레출판)가 출간됐다. 책은 단박에 인터넷 서점 알라딘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등 각종 베스트셀러 차트의 상위에 랭크됐다.

출판 불황기에도 무려 25만부가 팔린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 김 작가를 26일 낮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소설 ‘오래된 협약’이 품은 ‘죽음을 앞두고 시간을 나눈다’는 발상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처음 발단이 된 아이디어는 음식 금기였고, 소설을 쓰는 단계에서 벨라타 행성과 사람의 관계로 극적으로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물론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일대일로 대응한 것은 아니고, 이야기적인 변화가 들어갔지만. 그럼에도 처음 발단이 된 것은 두 가지였다. 되게 편하게 썼던 것 같다.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복잡해서 바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은유로 말하고 싶었다.”

단편 ‘인지 공간’은 인지 공간의 관리자인 ‘나’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작고 연약해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없던 ‘이브’와의 우정과 갈등을 그린 작품.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없던 이브는 인지 공간 밖으로 탐험하던 중 들짐승에 의해 죽고 만다. 나는 이브의 방에서 작은 인지 공간인 ‘스피어’를 발견하고, 완전한 세상이라고 여겼던 인지 공간이 사실은 모든 것을 담지 않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기억들을 지워간다는 걸 깨닫고 결국 인지 공간을 떠나기로 하는데. 제11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

―소설은 결국 작고, 배제되는 존재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과 연대를 보내는 것 같은데.

“이야기를 통해서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란 결국 자신의 결함이 아닌 세계의 결함이라는 것을 깨닫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는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

소설집의 처음을 장식한 ‘최후의 라이오니’는 행성 3420ED를 탐사하게 된 결함이 있는 복제인간 ‘나’와 행성의 기계들 리더인 ‘셀’의 우정을 그린 이야기다. 나는 시스템의 의뢰로 탐사할 가치가 없는 3420ED를 향했다가 기계들에게 붙잡히고, 리더 셀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된다. 시각을 잃은 로봇인 셀은 나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라이오니’라고 여겼고, 나는 죽어가는 셀을 만나서 그의 라이오니가 되는데.

―관건은 로몬인 내가 셀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라이오니인가 아닌지, 인데.

“아니다(웃음). 마지막 장면에서 구분을 지으려고 했었다. (셀도 이미 내가 라이오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 같은데) 그 부분도 일부러 모호하게 처리했다. 명쾌하게 알고 있는 것보다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게 관계를 복잡 미묘하게 만드니까. 그런 점을 표현하고 싶었다. 셀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기계이다 보니까, 오히려 기계의 사고 회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떤 낭만 미스터리를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면, 나는 라이오니인 것처럼 연기하고, 셀 역시 이를 받아주는 것이 되는데.

“서로 돌보는 관계를 묘사하고 싶었다. 저는 인간과 로봇, 인간과 외계인 관계를 쓸 때 인간과 반려동물과의 관계에서 따온 게 많다. 인간과 반려동물과의 관계를 보면, 한편으론 일방적으로 사람이 강아지나 개를 돌본다고 여겨지지만, 반대로 사람이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 때 동물이 와서 위로해준다는 쌍방향적인 면이 있는데, 그런 것을 SF적으로 재해석하고 싶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소설 속의 셀은 유기견, 버려진 강아지 같은 존재 아닐까.”

단편 ‘로라’는 뇌의 ‘잘못된 지도’와 몸의 불일치를 치료하기 위해 ‘로라’가 세 번째 팔을 이식받겠다고 연인 ‘진’에게 통보하고, 진은 이런 로라를 이해하기 위해 취재 여행을 떠났다가 사랑과 이해가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하고,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가능한가.

“이해와 사랑은 별개라고 생각한다(이해할 수 없더라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일단 그들 스스로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자신에 대해서 이해하고 싶고 궁금해할 것이고, 가족이나 연인 등이 그들만큼 궁금해할 수도 있다. 다른 정체성을 가진 가까운 사람의 힘이 되고 주고 싶고 그가 겪는 고통에 공감하고 싶지만, 마이너리티란 자기의 정체성을 설명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벽이 생길 수 있다. 소수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료를 찾아보고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거나, 과학적 측면에 대해 조사해서 조금 더 알게 됐을 때, 내가 가진 이해가 이 사람을 위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좀더 객관적인 데이터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확산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떤 사람들의 정체성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데이터화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아주 세심하게 다뤄지지 않으면 이해라는 하는 또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 명료하게 답을 내리지 못한 영역이기도 해서, 그것에 대한 제 생각을 ‘로라’를 통해 풀어본 것이다.”

소설집에는 이들 외에도 특별한 방식으로 춤추는 시각장애인(‘마리의 춤’)이나 발성기관이 퇴화돼 버린 ‘단희’(‘숨그림자’) 등 작고, 소외되고, 배제돼온, 하지만 사랑스런 우주적 존재들을 만날 수 있다. 1993년 울산에서 태어난 김초엽은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에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각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동시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작가 전문 매니지먼트 기업인 ‘블러썸 크리에이티브’에 소속돼 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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