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여론·개선 목소리 비등
학생들 현장 적응력·경험 쌓기 위해 도입
취지와 달리 위험한 곳서 단순 노동 많아
일주일 만에 일반 노동자와 동일 업무도
실습업체 32% 교육청 승인 없는 ‘참여기업’
전공과 무관한 분야서 단순 업무 수두룩
디자인과 학생이 반도체 생산직 들어가
홍정운군 미성년에 금지된 잠수작업중 변
학생들 “폐지보다 안전한 환경 조성해야”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부품처럼 느껴졌어요.”
올해 특성화고를 졸업한 A(19)양은 현장실습이 ‘교육’이 아닌 ‘노동 착취’였다고 회상했다. A양은 지난해 9월 반도체 생산직으로 현장실습을 나간 지 일주일 만에 일반 노동자들과 똑같은 업무에 투입됐다. 반도체 웨이퍼(실리콘 기판)의 온도를 높이는 ‘베이킹’ 작업을 했던 A양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가슴 철렁한 순간들을 마주했다. 섭씨 200도가 넘는 반도체 부품은 규정대로라면 30분간 식힌 뒤 보호장비를 착용한 상태에서 옮겨야 한다. 하지만 회사 측은 빨리 생산량을 채워야 한다며 식힌 지 10분도 안 된 부품을 보호장비도 없이 옮기라고 지시했다. A양은 “한 번은 달궈진 지 5분도 안 된 부품을 꺼내라고 해서 도저히 못 하겠다고 했더니 ‘그거 잡을 깡도 없으면서 일하러 왔냐’고 면박을 당했다”고 토로했다.
A양이 일하는 동안 학교 선생님들이 현장실습 과정을 확인하러 오기도 했지만, 방진복을 입어야 하는 ‘반도체 클린룸’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해 A양이 일하는 현장을 실제로 확인하진 못했다. A양은 “회사 직원들이 일하다 화상을 입는 것도 많이 봤고 일하다 다칠 수 있다는 생각에 늘 무서웠다”며 “뉴스에서 특성화고 학생이 현장실습 도중 사망한 사건을 봤을 때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얼마 전 전남 여수의 한 특성화고 학생이 현장실습 도중 사망하면서 특성화고 현장실습이 도마 위에 올랐다. 취업을 위해 현장 경험을 쌓게 한다는 당초 취지와 달리 위험한 곳에서 단순노동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졸업 후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학생들은 “꼭 필요한 제도”라며 “안전한 현장실습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취업 교육 위해 도입했지만… 관리 안 되는 기업 4000여곳
31일 교육부에 따르면 특성화고 학생들의 현장실습은 실습을 통해 현장 적응력을 높이고 경험을 쌓게 한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그러나 지난 2017년 제주도의 한 생수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이민호(당시 18세)군이 작업 도중 사망한 뒤 논란이 됐고, 교육부는 2018년부터 ‘조기 취업’ 형태가 아닌 ‘학습 중심’ 실습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실습 기간도 6개월에서 3개월로 줄였다. 또 노무사가 현장을 점검하고 교육청 승인을 받은 ‘선도기업’ 중심으로만 현장실습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까다로운 절차 탓에 기업 참여가 저조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2019년부터 다시 선도기업에 선정되지 않은 ‘참여기업’도 현장실습생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지난 6일 여수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숨진 홍정운(18)군 역시 교육청 승인을 받지 않은 참여기업에서 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참여기업의 경우 선도기업에 비해 현장실습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관리·감독이 어려운 상황이다. 대다수 특성화고는 교내 취업지원관 1명이 모든 현장실습생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홍군의 현장실습계획서에 적힌 업무는 ‘요트 정비 및 수리, (요트 탑승객) 서비스’였지만, 실제로는 미성년자에게 금지된 잠수작업을 하다 숨졌다.
열린민주당 강민정 의원실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현장실습 업체 1만1737곳 중 3759곳(32%)이 교육청 승인을 받지 않은 참여기업이었다. 전남 청소년노동인권센터 이규학 자문위원은 “사망한 홍군의 경우 해당 업체가 금지 업무인 잠수작업을 하는 곳이었지만, 학교는 현장실습에 적절하다고 표시했다”며 “서류만으로 심사하니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 아닌 단순노동’ 폐지해야 vs ‘폐지 아닌 양질의 실습 필요’
현장실습 제도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취업을 위한 교육이 아닌 노동착취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이민호군 사망 이후 실습 분야를 전공에 맞는 직무로 한정하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많은 학생은 실습에 나가 전공과 무관한 단순업무만 하고 있다. 홍군이 사망 전 했던 업무도 잠수해 요트 바닥의 따개비 등을 제거하는 것으로, 그의 전공(해양레저관광학)과 별 관련은 없었다. A양 역시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이를 살릴 수 있는 현장실습 기업이 하나도 없었다”며 “결국 반도체 생산직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현장실습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경엽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직위원장은 “현장실습은 교육을 가장한 학생노동이고 교육에 대한 책임을 기업에 떠넘기는 것”이라며 “현장실습을 폐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특성화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폐지는 과도하다는 입장이 많다. 최서현 전국특성화고노조위원장은 “현장실습은 취업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고, 졸업 전 자신의 전공에 대해 경험해볼 기회”라며 “폐지가 아니라 안전한 실습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청소년노동인권 강사인 강도연 노무사도 “현장실습 자체를 없애는 것은 오히려 학생들에게 좋지 않다”며 “교육청의 관리·감독이 가능한 선도기업을 늘려 학생들이 양질의 현장실습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더 이상 이런 일 없어야”… 거리로 나선 학생들
“미성년의 잠수작업은 법으로 금지됐다는 것만 알았어도….”
지난 28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현대백화점 앞에 10여개의 촛불이 켜졌다. 스피커에서는 ‘밤하늘의 별을’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달 초 여수에서 현장실습 도중 숨진 특성화고 학생 홍정운군이 생전 가장 좋아했던 노래다. 이날 자리는 홍군을 추모하기 위한 자리였다. 현장 발언에 나선 특성화고 졸업생 이유진(19)양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홍군이 법으로 금지된 작업을 하던 것을 언급하며 “학생들도 어떤 것이 부당한지 스스로 인지하려면 학교에서부터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은 지난 11일부터 매일 서울, 경기, 여수 등 전국에서 홍군을 추모하는 ‘전국 추모 촛불 행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홍군을 추모하며 안전한 현장실습 환경을 마련해달라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중이다.

이들의 요구는 △양질의 실습환경 및 안전대책 마련 △현장실습생 최저임금 보장 △학교 내 노동교육 제도화 등이다. 이들은 현재 특성화고 학생들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에 투입되는 등 위험한 노동 환경에 내몰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력을 제공하면서도 교육생이라란 이유로 노동자의 권리는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시영 특성화고노조 서울지부장은 “현재 특성화고 학생들은 노동자로 규정되지 않는다”며 “현장실습생을 똑같은 노동자로 노동법에 따라 처리해줘야 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기본적인 권리를 지킬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거리를 지나던 사람 중에는 학생들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추고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이들이 많았다. 추모에 나선 학생들이 “왜 어린 학생이 현장실습에 나가 목숨을 잃어야 하는가”라고 외치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고등학생 조예나(18)양도 서명에 동참했다. 조양은 “사망한 홍군을 보면서 특성화고에 다니는 친구가 생각나 마음이 아프고 남의 일 같지 않았다”며 “부당한 노동을 하고도 보호받지 못하는 학생이 없도록 힘을 모으고 싶다”고 말했다. 조영희(55)씨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홍군의 사고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며 “학생들이 부당한 대우를 당하지 않게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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