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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귀은의멜랑콜리아] 패자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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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10-11 22:51:50 수정 : 2021-10-11 22: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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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룰’ 사라진 선거판
진정한 정치 발전 못 이뤄
기득권 깨려는 ‘좋은 패자’
아름다운 균열에 관심을

계획은 실패할 때가 많고, 싸움에선 질 때가 더 많다. 평범한 사람의 인생은 승이 아니라 패로 이루어진다. 얼마나 잘 패하는지가 얼마나 잘 사는가로 수렴된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패했던 수많은 게임, 그 게임의 판은 공정했던가.

승패는 누가 더 능력이 있는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누가 더 그 룰에 잘 적응했는가로 판가름난다. 그 룰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아이템이 필요하다. 돈이나 권력, 남이 가지지 못한 정보를 독식하면 그 룰을 뛰어넘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 아이템을 가진 자와 그들만의 카르텔을 상대로 싸우는 판이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결국 승자는 그 룰을 더 확고히 하면서 시스템을 지배한다. 패자는 자신의 무능력과 불운을 탓하며 자책한다. 그러나 어떤 패자는 게임의 부조리함과 부당함에 질문을 던진다. ‘왜 패했는가’라는 질문은 게임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한귀은 국립경상대 교수·작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네 번째 룰은 이렇다. 먼저, 원하는 파트너를 정한다. 모두 강한 자와 파트너가 되려 한다. 아무도 여자A와 파트너가 되려 하지 않는다. 여자B가 다가와 파트너를 청한다. ‘왜 나냐’고 A가 묻는다. ‘너밖에 없다’, B가 말한다. A는 자신이 게임에서 꼭 이겨야 한다며 B를 경계한다. B는 반드시 이기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공개된 룰은 당혹스럽다. 파트너가 된 바로 그 두 사람이 경쟁하는 게임이다. 둘 중 하나는 죽게 된다. B가 진다. 의도한 패배다. 자신이 패함으로써 A를 이기게 해준다. 화를 내는 A에게 B는 이렇게 말한다. “좀 멋있게 지게 해줘라. ”

B는 왜 그랬을까. 몇 개의 답변이 생각나지만 충분치 않다. ‘왜’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정답을 찾지 못한 이 잔여감이 시스템 자체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이 룰과 이 게임, 이 시스템은 정당한 것인가. A를 이기게 해준 B의 선의에 집중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문제는, 게임 자체에 있다. 오징어게임의 부조리는 수많은 패자에게서 드러난다.

대선에서 누가 어떻게 패할 것인가 지켜보게 된다. 승자는 룰을 잘 이해하고 잘 사용한 자일 것이다. 누가 대선에서 이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처럼 무력해진 적이 있었던가. 대선 게임판이 온당하지 않다면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도 생산적일 리 없다.

대선판은 투명하지 않다. 후보와 보좌진만이 아니라 정부 여당, 야당, 당원, 국회의원, 검찰, 경찰, 공수처까지 이 게임판에 올라와 있다.

여기에, 사건만 터지면 그에 대해 편집증적으로 끼어드는 사이버렉카 유튜버들도 가세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플랫폼은 이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거대한 증폭기이다. 합리적인 룰이 있다 하더라도 이 룰이 작동하기 어렵다. 룰은 재해석되고 왜곡되고 때로는 악용된다. 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케팅과 광고, 이미지와 스펙터클, 포퓰리즘, 쇼비즈니스, 혹은 막후거래인 것 같다. 최근 대장동 사건을 둘러싼 의혹을 보면 우리의 정치계가 정견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단지 ‘돈’을 따라 이합집산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좋은 패자에게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좋은 패자는 질문을 남긴다. 정치의 발전은 이들에게서 시작될 것이다. 기득권을 움켜쥐고 살아남은 정치인보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패배한 정치인이 권력구조에 균열을 내고 이 세계에 질문을 던진다.

이젠 잊힌 일이다.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일이지만, 수많은 이슈로 이 정도의 일은 금방 덮인다. 지난 8월 12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국가가 국민을 책임질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 문장의 진위를 떠나서 분명 인문학에서는 질문을 던지는 명제이다. 정치권에서는 아닌가 보다. 특히 대통령 후보가 할 말은 아니었나 보다. 정치권에서는 낯선 말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다른 후보들이 대통령 자격 운운하며 비판했다. 당연한 비판이다. 너무 당연해서 ‘비판’의 기능은 상실된다. 대통령 후보라면 더 통찰력 있는 비판을 해야 한다. 최 전 감사원장은 부연했다. 국가가 책임을 진다면 그것은 전체주의이거나 거짓말이라고.

포스트민주주의 시대라고들 한다. 민주주의가 유지는 되고 있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며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은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2017년 세계 석학들은 ‘거대한 후퇴’라는 책에서 포퓰리즘이 자유민주주의를 대신하고 있다고 썼다. 특히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는 “지금은 국권위기의 시대이며, 현대의 어떤 국민국가도 자국의 국가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담론은 최 전 감사원장이 던진 질문을 또 한 번 숙려하게 만든다.

불확실한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확신을 주는 리더를 욕망한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급변하는 시대, 고도로 전문화돼 이 모든 분야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단독자가 존재할 리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런 시대에 누군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준다면 그것은 기만일 터인데, 우리는 불안보다는 기만을 택한다. 안정감을 주는 기만으로 자신을 마케팅하는 후보가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며 우리를 긴장시키는 후보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닐까.

좋은 패자가 많이 나올 수 있는 대선판이 좋은 승자를 낼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4등 대선 후보를 응원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들이 이 대선판에 아름다운 균열을 내며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이 민주주의를 문득 다시 귀환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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