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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미국에서 연수하던 시절 일이다. 방학 중에 서부 여행을 위해 가족과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 예정 시간이 됐는데도 비행기는 출발을 안 했 다. 문제가 생겨 이륙이 다소 늦어질 거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한 시간이 지나도 출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과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주변 반응이었다. 다들 불만이 없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공연장이나 관광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인들은 좀처럼 조급해하는 법이 없었다. 불평 없이 오랜 시간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빨리 빨리’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어다.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ppalli ppalli’ 가 등재됐을 정도다.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이 몇 년 전 한국인과 외국인 540명을 대상으로 ‘한국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 무엇이냐’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빨리 빨리(한국인 48.2%, 외국인 64.4%)’라는 답이 가장 많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닫힘’ 버튼을 계속 누르는 조급증은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시대에도 여전하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비롯한 각종 콘텐츠를 빠르게 넘겨가며 보는 ‘빨리 감기 중독’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영상 속도를 1.25배 또는 1.5배속으로 높이거나 요약본으로 줄거리만 대충 훑어보는 것이다. 월 정액제로 영화나 도서 등 콘텐츠를 무제한 제공하는 서비스가 대중화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비대면 녹화 수업도 1.5~2배속으로 보는 대학생도 많다. 일부 포털·언론사에선 요약본을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인터넷 기사 상단에 ‘기사 요약’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몇 시간 내내 ‘1배속’으로 진행되는 영화와 뮤지컬 관람을 참지 못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조급증으로 불리는 한국인의 ‘빨리 빨리’ 문화에 역기능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최단기 압축 성장을 이루고, 정보화 시대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추는 데 기여한 공이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 일상생활까지도 속도 만능주의에 지배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해도 우리 삶까지 빨리 감기하는 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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