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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땅속 뜻밖의 보물… 실록 속 그곳 베일 벗기다 [S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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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10-02 16:00:00 수정 : 2021-10-04 11: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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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소규모 유물 발굴 결실과 한계

위치 몰랐던 조선 사라진 궁궐 ‘인경궁’
공사 직전 배수로 유적 나와 실체 확인
삼국유사서 딱 한줄 언급 백제 ‘대통사’
공주서 나한성·기와 등 출토… 학계 반향
원삼국시대 분묘, 키 180㎝ 고대인 인골
주택 신축 진행과정 우연히 쏟아져 화제

전액 국비 지원받는 개인부지 발굴조사
문화재 가치 크면 보존 결정·국가 매입
공사 좌절된 토지주 소유권 침해 논란
인접지 대부분 사유지… 추가발굴 못해
학계 “부지 못쓰게 묶어두고 결국 방치
토지주 반감만 불러… 실질 대책 필요”
서울 종로구 누하동에서 진행된 발굴에서 조선시대 인경궁의 배수로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돼 관계자들이 덮개돌을 정리하고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인경궁은 조선의 ‘사라진 궁궐’이었다. 신하들의 손에 쫓겨난 임금 광해의 삶과 꼭 닮은 곡절 많은 궁궐. 광해의 명으로 인경궁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공사는 중지되었다. 광해를 몰아내고 새 임금이 된 인조는 소실된 창경궁, 창덕궁의 재건을 위해 인경궁 자재들을 가져다 썼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인경궁이 영조대에 이르러 있었던 곳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증언한다.

“임금이… 인경궁의 옛터를 살펴보게 했다. …승지가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노인에게 물어봤더니 인왕산 아래 사직단 왼쪽에 있었던 듯한데 상세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고 하였다.”(영조 45년 11월 영조실록)

2017년 서울 종로구 누하동의 한 발굴 현장. 지표에서 2m 정도를 파고들어가자 너비 165㎝, 높이 90㎝ 크기의 돌 13개가 4m 정도에 걸쳐 나란히 놓인 게 발견됐다. 일반 양반가옥에서 쓰던 것보다 훨씬 큰 배수로의 덮개돌이었다. 실록의 내용, 발굴 현장 위치, 덮개돌의 큰 덩치 등을 종합하니 인경궁의 지하시설 일부가 아니라면 정체를 설명할 수 없었다. 짐작만 할 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던 인경궁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소규모 발굴조사를 통해 얻은 성과다. 땅 밑에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도 못한 채 이뤄진 발굴에서 얻은 뜻밖의 결과. 용도와 가치, 의미가 파악된 곳을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벌이는 학술발굴과는 다른 특징이다. 발굴 대상지가 일정 면적 이하(개인사업·단독주택 792㎡, 농어업시설·공장 2644㎡)일 때 복권판매 수익금의 일부로 마련한 국비로 경비를 부담하는 것이 소규모 발굴이다. 민간에서 집이나 작은 사업장 등의 공사를 할 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인경궁터 확인처럼 생각지도 못한 성과를 얻을 때가 있다. 문헌에 문자로만 전해지던, 혹은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짐작만 하던 것이 실제로 확인돼 세상을 놀라게 한다.

 

◆땅 밑에서 솟았나… 뜻밖의 성과 건진 소규모 발굴

2018년 1월 충남 공주시 반죽동의 한 발굴 현장에 고고학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나한상으로 추정되는 소조상 조각, 치미 등과 2만점이 넘는 기와편이 나와 대형 건물의 흔적임에 분명했다. 이 중 단연 주목을 끈 것은 ‘대통’(大通)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찍힌 기와 조각이었다. ‘삼국유사’에 백제 성왕이 527년 수도 웅진에 창건한 것으로 기록된 ‘대통사’가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이듬해 대통 두 글자가 보다 분명한 기와가 인근에서 출토됐다.

“삼국시대 사찰 가운데 건립 연대, 장소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절인 대통사의 실체를 드러낼 유적이다.”

고고학계는 흥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은 문화재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보존이 결정됐다. 공주교대 이병호 교수는 “삼국유사에 딱 한 줄로 등장하는 사찰이라 위치는 물론이고 실제 존재 여부를 두고도 논란이 많았던 곳”이라며 “인근 지역에 대한 발굴이 좀 더 진행되면 (대통사에 있었던) 목탑지 같은 게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런 게 나온다면 정림사, 미륵사 등으로 이어지는 백제 사찰의 원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백제 대통사지서 발굴된 ‘대통’(大通) 두 글자를 새긴 기와 조각

대통사지 발견은 이 지역에 한옥을 신축하기로 하면서 시작된 소규모 발굴이 단초였다.

어떤 형태의 발굴이든 경주를 빼놓을 수는 없다. 어디를 파든 유물이 나오고, 유적이 확인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 이 도시는 소규모 발굴에서도 성과가 가장 뚜렷한 곳이다. 탑동 천원마을 일대의 탑동유적이 단연 눈길을 끈다. 지난 7월 고대인으로는 가장 키(180㎝)가 큰 인골이 출토돼 화제를 모은 그 곳이다.

경주 탑동유적에 확인된 옹관묘

탑동 유적은 천원마을 진입로를 따라 단독주택, 한옥펜션 등이 들어서면서 2010년부터 발굴이 시작됐다. 올해까지 발굴된 곳은 15개 지점. 원삼국시대(초기철기시대 이후∼삼국시대 이전으로 서기전 100년경∼서기 300년경의 약 400년간) 목관묘 3기를 비롯해 신라의 다양한 분묘 190여 기, 청동제 검과 거울, 장식류, 무기류 등이 발견됐다. “매장시설의 흔적이 양호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다수 확인됐고, 다양한 자세의 인골이 나와 당시 매장문화와 신라인들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는 평가는 이런 성과를 반영한 것이다. 발굴에 참여했던 한국문화재재단 박강민 팀장은 “발굴 이전까지는 무덤이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며 “이 지역에서는 1세기경 수장급 무덤이 확인되지 않다가 (탑동유적 발굴 이후로)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됐다. 건물지도 나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이 지역으로 도시가 확장됐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경주 갑산사지에서 나온 전불

경주 안강읍의 갑산사지는 땅 주인들이 공장을 짓기 위해 시작한 소규모 발굴을 통해 실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 사례다. 갑산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초 학자인 권근의 ‘양촌선생문집’이 유일하다. “…갑산 주지 원공 성원 …건문 3년 봄에 계림의 갑산사 주지…”라는 내용이다.

공장 신축 계획에 따라 진행된 발굴에서 축대 등이 확인됐고, 석탑의 벽면을 마무리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불’이 나왔다. 7세기 전후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나와 그 즈음 건립되었고, 폐사 시기는 15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재단은 “신라 왕경에서 출토되는 막새류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은 것들이 나왔고, 통일신라시대 작품 중 비슷한 사례가 드문 전불과 소형 금동불상 등은 갑산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10일 경주 황리단길 인근에서 소규모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인접한 민가와 카페는 7세기 경 건물지를 조사하는 이 현장이 지금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일상에 밀착한 소규모 발굴, 부담 최소화해야

지난달 10일 경주 황리단길 인근의 한 발굴 현장. 카페 신축을 앞두고 해당 부지의 매장문화재 잔존 여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시점까지 나온 기와 조각, 기둥 흔적 등을 보아 7∼8세기 2∼3칸 규모의 건물이 있던 자리로 보였다. 1000년 전, 신라인들이 살았던 건물의 흔적을 찾는 작업이 진행 중인 현장이지만 21세기의 일상과 분리되지 않은 느낌이 강하다. 현장을 따라 이어진 좁은 도로를 따라 무시로 오가는 사람들, 인접한 민가와 다른 카페들 때문이다. 이미 확인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보다 면밀하게 확인하기 위해 진행되어 어딘가 엄숙한 분위기까지 감지되는 학술발굴 현장의 분위기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런 특징은 소규모 발굴의 한계, 문화재 개발과 보존의 충돌이라는 해묵은 과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주 대통사지로 돌아가보자. 해당 지역 발굴은 한옥 신축에 앞서 문화재 확인을 위해 시작됐다. 그러나 ‘대통’명 기와 조각을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면서 한옥 신축은 없던 일이 됐다. “구체적인 유적 성격을 밝히기 위해 인접 지역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보존 결정이 내려진 데 따른 것이었고, 예산을 들여 토지를 매입했다. 문화재 보존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전향적인 결정이겠으나 한옥을 지으려던 토지 소유자 입장에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후 대통사지의 성격, 가치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한 추가발굴이 이뤄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인접 지역이 모두 사유지이기 때문에 소유주가 발굴을 요청하지 않은 한 불가능하다.

대통사지 사례는 전국의 수많은 소규모 발굴 현장이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건물 신축 부지 내에서만 발굴이 가능하기 때문에 중요한 유물, 유구가 나온다고 해도 발굴 지역을 확대해 전체적인 양상을 확인하기 힘들다. 주변 지역 토지 소유자가 발굴 요청을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또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한 결정은 해당 지역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 토지를 활용해 얻을 것으로 기대하는 이익의 실현과 충돌하기 마련이다. 자기 땅에서 문화재가 발견됐을 때 사람들이 반기가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재계 내부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한 비판이 강하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대통사지만 해도 유적의 가치가 큰 건 알지만 지금처럼 아무것도 못한 채 나대지처럼 묶어두는 게 말이 되냐”며 “문화재가 나왔다고 소유권을 침해하는 조치를 취하거나, 활용을 제한하면 문화재에 대한 감정만 상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이유로 최근에는 토지 소유자의 권리과 이익 실현을 보장해 주고, 문화재 발견에 따른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소규모 발굴의 비용을 복권발행으로 얻은 수익금 일부를 문화재보호기금으로 조성해 전액 국비로 부담하는 게 대표적이다. 문화재 잔존 여부 확인을 위해 불가피하게 발굴해야 할 경우 국민 부담을 없앤 것이다. 복권기금으로 소규모 발굴 비용을 전액 지원하는 정책은 2004년 시작됐다. 당시에는 4억7000여 만원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규모를 늘려 올해 200억원 가까이 책정됐고, 내년에는 200억원 이상을 확보했다.

보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 때는 해당 토지를 국가가 매입하는 정책도 시행 중이다. 보전 결정이 내려질 경우 소유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니 국가가 땅을 사는 거이다. 이를 위한 예산은 25억원이 책정되어 있다.


경주=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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