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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이책만은꼭] 인간 구원의 길, 만인의 지식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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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9-13 22:47:09 수정 : 2021-09-13 22:4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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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대중에 읽히기 위해 ‘신곡’ 속어로 써
귀족이 독점했던 지식·사유, 모두가 공유

단테 사후 700주년을 맞는 날이다. 중세의 종언을 선언하고 근대의 축포를 쏘아올린 이 위대한 작가는 1321년 9월 13일 또는 14일 세상을 떠났다. 나이 쉰여섯 살, 망명객 신분이었다. 1301년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후 단테는 “남의 빵을 먹고 사는 맛이 얼마나 짠지,/ 남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느끼면서 정치 대신 문학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인간을 구원할 길을 찾는다. 죽기 한 해 전인 1320년까지 이어진 ‘신곡’ 작업의 출발이다.

총 행수 1만4233행인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의 3편으로 나뉘고, 각 편당 33곡에 별도의 서곡을 더해서 총 100곡으로 구성돼 있다. 3이라는 숫자는 삼위일체를, 33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을 뜻한다. 이러한 구성은 타락한 삶의 모든 실상과 인간 구원 과정을 완벽하게 전하려는 단테의 문학적 야심을 보여준다.

“인생길 반 고비에, 나는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었네.” ‘신곡’의 첫 구절이다. ‘어두운 숲’은 고향을 잃고 떠돌이가 된 단테 개인의 참혹한 신세를 뜻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인류의 미망을 상징한다. 숲에서 단테는 표범(탐욕)과 사자(오만)와 암늑대(음욕)를 피해 도망치다가 인간 이성의 상징인 베르길리우스를 만난 후, 그의 인도를 받아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여행에 나선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지옥문에 적혀 있는 구절이다. 단테에 따르면, 지옥은 희망이 없는 장소다. 살면서 기쁨을 느끼지 못할 때, 눈물과 탄식이 이어질 때, 좌절과 절망이 가득할 때, 삶은 어디든 지옥이 된다. 인간이 이런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색욕, 탐식, 인색, 낭비, 분노, 이단, 폭력, 사기, 배신 등의 죄 탓이다. 특히 귀족, 사제 등 권력의 타락은 자신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지옥으로 만든다.

지옥에서 죄악의 모든 실상을 본 단테는 이어서 연옥에 들어간다. 연옥은 뒤늦게 자기 죄를 깨달은 인간이 참회하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곳이다. 연옥 끝에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와 헤어져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의 손을 잡고 천국으로 올라가 신의 궁극적 사랑을 체험한다. ‘신곡’은 이처럼 인간 구원의 드라마를 지성의 힘과 사랑의 신비가 함께하는 긴 여행의 형태로 보여주면서 기독교의 구원과 그리스·로마의 인문주의를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다. 신앙의 텃밭에 인문의 씨가 뿌려지는 순간이다.

단테는 ‘신곡’을 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속어(민중어)인 토스카나어로 썼다.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서였다. 단테의 바람대로 사람들은 열광했다. 작품을 낭송하는 시인들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시민들은 환호했다. ‘신곡’과 함께 사제와 귀족이 독점했던 신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사유가 만인의 소유로 바뀌었다. 인간 전체가 지성으로 사랑을 이해하고 감각으로 구원을 체험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로 이어지는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보카치오에 따르면, ‘신곡’은 공작새 같은 작품이다. ‘신곡’에는 사랑과 증오, 겸손과 오만, 관용과 질투, 절제와 탐욕 등 인간 삶 전체가 다채롭게 빛난다. 덕분에 삶의 의미를 잃고 헤매는 이들은 누구나 이 작품에서 자기 얼굴을 발견하고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가을 첫 독서를 ‘신곡’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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