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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편리함 때문 누군가 소외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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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9-10 23:06:38 수정 : 2021-09-10 23: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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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야근 후 퇴근길이었다. 버스정류장 쪽으로 걷고 있는데,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던 스마트폰이 꺼져버렸다. 늦은 시간이라 업무 문제로 급하게 연락 올 일도 없으니 신경 안 쓰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아차’ 싶었다. 평소 스마트폰의 모바일 교통카드 기능을 이용해 버스를 탄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스마트폰이 꺼졌다는 건 버스를 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지갑에 신용카드가 있었지만 발급할 때 교통카드 기능을 넣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버스를 탄 뒤 카드 단말기에 신용카드를 갖다 댔으나 야속하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행히 지갑 속에 천 원짜리가 있어 무사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김유나 사회부 기자

만약 몇 달 뒤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나는 꼼짝없이 버스에서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 버스를 보낸 뒤에도 도저히 버스를 탈 방법이 없어 집까지 택시를 타야 할 수도 있다. 서울시가 시내버스 현금승차를 폐지한다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시는 다음 달부터 6개월간 일부 시내버스 노선을 대상으로 현금승차 폐지를 시범 운영하고, 향후 모든 노선에서 현금승차를 폐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난해 현금승차 비율이 0.8%에 불과했다”며 “현금승차가 사라지면 버스 기사의 번거로움과 지폐·동전으로 인한 바이러스 감염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교통카드를 깜빡한 이들을 위해서는 정류장에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교통카드 발급받을 수 있는 QR코드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만일 교통카드도, 스마트폰도 없다면? 그에 대한 대안은 없었다. 정책 자체가 ‘버스를 타는 사람은 스마트폰이 있을 것’이란 전제를 깔고 세워진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거나 조작이 어려운 사람은 버스에 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지만 이들은 고려 대상이 아닌 듯했다.

버스에서 현금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교통카드를 잊고 나와서, 교통카드 충전금액이 떨어져서, 가끔 버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교통카드를 발급받지 않아서 현금을 쓴다. 현금이 최후의 보루가 되는 셈이다.

서울시 조사 결과 버스에서 현금을 쓰는 이들 중 20%가량은 노인과 어린이였다. 만일 현금승차가 폐지된다면 이들이 스마트폰으로 교통카드를 발급받아 버스를 탈 수 있을까?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의 스마트폰 보유율은 56.4%였다. 스마트폰이 있더라도 혼자 애플리케이션(앱)을 깔 수 없는 등 자유로운 조작이 어려운 노인도 많다. 서울시는 현금승차 폐지 이유로 ‘편리함’을 내세우지만, 누군가에겐 그 편리함이 소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사회 전반적으로 키오스크를 이용한 무인 주문이 늘며 디지털 기기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고충이 커지고 있다. 키오스크가 늘어선 매장에서 주문을 포기하고 나가는 노인의 모습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사회가 ‘스마트폰이나 키오스크 조작 정도는 쉽게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만 같다.

다수의 편리함 때문에 누군가 소외된다면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없다. ‘스마트폰 사용이 자유로운’ 이들이 정책의 기본값이 돼선 안 되지 않을까. 다수의 편리함보다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불편도 고려하는 세심한 정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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