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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명문가 종손 성유경 일가
‘사회주의 낙원’ 꿈꾸면서 월북
외손자 김정남 암살 등 비극 결말
‘권력 소외’ 방랑의 끝은 어딜까

끔찍한 살인의 현장은 전혀 살벌해 보이지 않는다. 살인을 지휘한 사람들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살해를 지원했다는 사람, 고위 외교관이거나 화학자라는 민간인도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들의 결백과 함께 정치적인 연설도 늘어놓았다.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하수인 두 젊은 여성은 그저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기록 영화, ‘암살자들’을 보았다. 늘 그렇듯이 사람의 관심은 정치에만 쏠려있다. 비명에 간 피해자가 북한 최고 권력자의 배다른 형이라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가 한때 영남의 유수한 사대부 가계의 종손이며 재력가였던 성유경의 외손자라는 것은 잊고 있다.

그의 죽음은 3대에 걸친 성유경 집안의 방황의 새로운 한 막에 불과했다. 성유경의 또 다른 외손자 이한영은 남한에서 역시 북한 정권의 하수인 손에 의해 비명에 갔다. 젊은 여인 둘은 그저 즐거운 영상물을 찍는 것으로 알았다고 했다. 이들의 옷차림이나 화장한 모습은 이들이 살고 있는 전통적인 농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 젊은 여인들은 연예계 진출의 꿈을 안고 큰 도회지로 나온 것이 아니었나. 연예계 언저리에서 방황했고 그래서 쉽게 북한 공작원의 회유에 빠진 것이 아니었나.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성유경은 자기가 태어난 사회의 봉건적인 모순과 부조리에 일찍 눈을 떴다. 일본 유학 중 접한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역시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신여성 김원주를 만나 동거하면서 고향의 본처와는 이혼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여전히 남존여비의 봉건적인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의 첫 방황은 전통적인 생활 인습과 근대의 추구 중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정작 본격적인 방황은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던 사회주의의 나라 북한에서 일어났다. 재산을 모두 소작인에게 분배해 주고 이상을 좇아 간 북한에서 그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 사회주의의 이상은 1인 숭배와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된다. 함께 했던 남한 출신은 하나둘 제거된다. 살아남은 사람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이다. 만석꾼 창녕성씨의 종손 사회주의자는 농촌에서 가축을 돌보며 아궁이 옆에서 잠을 자는 신세로까지 전락한다. 남노당 출신 인사들이 정말로 미국의 간첩이었는가 하는 딸의 질문에 모르겠다는 대답만 한다.

성유경보다 더 큰 시련은 오히려 그의 아내 김원주였다. 가족에게 폭군으로 군림하는 파렴치한을 부친으로 극빈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경 유학까지 하고 독립된 직장 여성으로 서는 과정은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김원주의 인생 초반의 분투에는 수백년 이 땅에서 고난의 삶을 이어온 여성의 한이 서려있다. 해방 이후 사회주의 인사들과 가까워진 후에는 마침내 자신의 갈 길을 찾았다. 가정도 제쳐두고 월북했고 주로 선전 선동의 매체 분야에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휴전 이후의 현실에는 그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영락한 일족에게 탈출구는 둘째 딸 성혜림에게서 왔다. 이미 결혼해서 딸도 하나 있는 인기 배우는 어느 날 김정일의 눈에 들어 그와 비밀스러운 동거에 들어간다. 일가는 하루아침에 초특권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이 특권은 물질적인 혜택뿐 이들이 생각했던 사회주의 낙원의 건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화려한 감옥과 같은 것이었다. 김원주나 큰딸 성혜랑 모두 김정일 후궁의 도우미 신세로 감사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성혜림의 김정일과의 동거가 가족을 위한 희생이었는가 아니면 일말의 로맨스 요소라도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마침내 김정일의 관심이 다른 여인에게로 옮겨지자 외국에서 홀로 외롭게 죽었다는 사실이다. 임종 순간 성유경의 마지막 소원은 10년 동안 못 본 딸을 한번 보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이루어질 수 없었다. 김정남은 한때 김정일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권력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그가 이 지위에서 밀려난 이유 중 가장 확실한 것은 부친의 총애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역대 왕조의 후궁 사이에서 흔히 일어났던 일이었다. 권력에서 소외된 그는 방랑의 길에 섰다. 그의 죽음으로 성유경 일가의 방황은 끝이 났는가. 아니면 새로운 비극을 예비하고 있는 것인가?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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