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때부터 차관급 이상 고위직만 10번
보수·진보 떠나 탁월한 행정 인정 받아
“공직 생활 36년 ‘자리’ 얘기해본 적 없어”
재정 상황 등 고려 땐 선택적 복지 타당
기후변화 대응 위해서도 원전 유지 필요
한·미동맹 중시 양국 대통령 선언 긍정적
우리 사회 부족중심주의?편가르기 심각
민주주의의 적인 포퓰리즘 억제해야
지도자 제1 덕목은 국민 신뢰 받는 것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보수와 진보 정권에서 장차관급에 발탁될 정도로 진영을 떠나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경제, 통상, 외교 분야에서 테크노크라트(전문관료)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총리로 행정 각부를 통할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국정의 우선순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국정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전 총리는 “헌법 제119조에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며 “헌법정신에 따라 큰 정부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민간의 자유와 창의를 많이 신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민간의 자유와 창의는 국가의 과도한 규제를 폐지하는 것과 직결돼 있다”며 “정부는 규제혁신을 과감히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정치권은 그들의 필요에 의한 정책 추진을 자제해야 할 중요한 시기”라며 “리더십을 행사하는 대통령, 장차관은 정책 추진에 따른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입장을 명확한 논리로 정치권뿐 아니라 언론, 시민단체 등을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에서 차관급 이상 10개 고위직을 맡은 데 대해 “36년 공직 생활을 하며 윗분들한테 ‘어디 가고 싶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 2일 서울 광화문 개인 사무실에서 한 전 총리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이며, 해결책은.
“국가가 부강하고 국민이 행복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생산력과 기술력이 높아야 하며 인적자원이 풍부해야 한다. 둘째, 대내적으로 국가 재정이 중장기적으로 튼튼해야 한다. 국가 거시재정이 모든 국민에게 지속적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면 보편적 복지를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렇더라도 개인의 성취욕을 무력화하거나 둔화시켜서는 안 된다. 지금은 우리 재정이 넉넉하지 않고, 남북통일, 사회안전망 확충 등을 고려해 선택적 복지를 하는 게 타당하다. 셋째, 대외적으로 국제수지가 흑자를 유지해야 한다. 세 가지 조건을 갖췄다고 해서 국민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일자리, 교육, 의료, 주택, 은퇴 후 연금 다섯 가지가 뒷받침돼야 국민 행복이 가능하다. 구체적 방안으로 첫째, 정부와 민간의 역할을 완전히 재정립해야 한다. 팬데믹(감염병 대유형) 코로나19와 정치적으로 민감한 양극화 과제가 있으나 정부와 민간은 조화를 이루고 보완재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 정부 역할이 너무 많은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중장기적으로 국가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둘째, 정부와 민간이 협력관계를 구축해 우리나라가 그동안 발전하며 각 분야에서 형성된 엄청난 기득권을 혁파해야 한다. 정부 혼자 할 수 없고 민간, 언론, 시민단체가 함께해야 한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한 입장은.
“대한민국은 2015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 협약인 파리협약에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아 창립 당사국으로 가입했다. 이에 따라 2030년까지 2017년 기준 온실가스 배출을 24.4% 줄이겠다는 계획을 작년 말 유엔에 제출했고 같은 해 10월엔 전 세계에 2050년까지 순온실가스 배출을 제로로 한다는 약속도 했다. 우리의 산업 현실을 보면 국내 총생산 중 제조업 비중이 28%로 미국의 16%, EU의 11%보다 높고 국제수지 흑자의 핵심인 수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98%다. 온실가스를 줄이려면 자동차, 난방에서 보듯 비용이 저렴하고 열효율이 높은 석유나 석탄을 직접 사용하는 방식에서 고급 에너지인 전기로 에너지원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전기를 생산하는 부문이 전체 온실가스 배출의 40% 정도를 차지해 전력 생산부문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게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철강 등 주력산업의 생산을 줄여야 한다. 전력부문에서 저탄소화를 실현하기 위해선 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사용한 발전을 줄이고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신재생 에너지의 주력인 태양광, 풍력 등은 날씨나 기후에 따라 발전이 영향을 받는 ‘전력 생산의 간헐성’을 기술적으로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또 문제 해결에도 상당한 시간이 예상돼 기저 전력으로서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원자력 발전은 온실가스 배출이 거의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오랫동안 원전을 건설, 운영하고 수출한 경험, 강하고 효율적인 원전 생태계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은 원자력을 유지,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의 원자력 발전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고, 아랍에미리트에 수출한 바라카 원전에서 보듯 원전 수출을 통해 새롭고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우리의 먹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대한민국의 기후변화 대응 의무 이행을 위해서도 석탄 발전 등의 대폭 축소, 신재생 에너지 확대, 원자력 유지와 발전은 같이 가야 한다.”

―대북정책은 어떤 기조를 유지해야 하나.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은 우리에게 굉장히 좋다. 북한은 과거 예를 보면 도발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직 그런 액션이 없다. 북한이 바이든 대통령을 믿기 때문이다. 주미 대사하며 당시 바이든 부통령을 몇 번 만났는데, 바이든 정부 인사들은 협상주의자다. 그러면서 대북 협상이 쉽지 않은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바이든 대통령은 임기 중 북한과의 관계에 큰 진전이 없을 것에도 대비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과 이란에 첫째 외교, 둘째 억지가 기본 입장이다. 협상하되 잘되지 않아 북한이 핵을 계속 가지게 되는 경우 충분히 억제할 수 있는 억지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본 입장도 당연히 미국과 같아야 한다. 북핵은 우리 안보의 큰 위협이므로 외교, 남북관계 개선, 억지력 확보 세 가지를 잘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핵을 보유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튼튼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미국의 핵우산을 우리의 실효적 억지력으로 쓰도록 해야 한다.”
―문재인 출범 후 한·미동맹이 과거와 같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한·미 당국자 간의 회의결과인 선언문, 외교 최고책임자인 양국 대통령께서 한·미 간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 가장 믿을 만한 근거가 아닌가 싶다. 그런 측면에서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온 성명은 굉장히 긍정적이다. 한·미동맹을 중시하고, 양국 간 관계뿐 아니라 동북아, 아시아, 세계에 기여하는 관계라고 밝혔다. 한·미 양국이 잘해야 하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고 북한에 대해서도 일치되고, 조화된 정책 조율을 하겠다고 했다. 한·미동맹은 한국으로선 가장 중요한 나라와의 동맹이고 또 유일한 동맹이다. 잉크로 쓴 동맹은 지울 수 있으나 피로 쓴 동맹은 지울 수 없다.”

―중국, 일본과는 어떻게 해야 하나.
“중국이 그냥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국제 질서를 지키는 쪽으로 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국제사법재판소가 남중국해는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판정한 가운데 중국이 인공 섬을 만들어 활주로를 쌓아 군사기지화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국제사회는 중국이 세계 경제 2위 대국에 맞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또 국내적으론 중국 국민의 자유, 인권, 노동, 환경권 등 인류 보편적 기본권이 국제사회와 동등한 수준으로 보호받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국제적인 룰을 지켰으면 좋겠다는 거다. 중국은 북한 문제에도 연관돼 있다. 중국이 북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이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보지만 그런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일본은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로, 한·일관계는 절대로 이대로 가선 안 된다. 한·일관계는 양국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미·일 안보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동북아에서 한·미·일 간 협력관계는 필수다. 이런 상황인데 징용,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로 인해 한·일관계가 어려운 국면에 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일본에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나 현실을 바탕으로 정책을 추진해 좋은 한·일관계와 굳건한 한·미·일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존경받는 국가 원로가 없다.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우리 사회가 너무 갈라져 있다. 지금처럼 양극화 현상이 심한 상황에서 외국에서 일어난 ‘우리 편 아니면 다 적’이라는 부족중심주의(tribalism) 같은 사고는 맞지 않는다. 이를 극복하려면 리더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하는 분들, 고위 관료, 시민단체, 종교계, 언론계 리더들은 부족중심주의가 아니라 통합의 사회로 가는 길을 걸어야 하고, 단기적으로 자신이 손해를 입지만 우리 사회가 갈 장기적인 길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은 편 가르기를 조장하거나 앞장서는 리더들을 응징해야 하며, 이를 위한 평화적이며 확실한 시스템은 선거다. 그러나 선거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을 뽑는 민주주의 제도로, 포퓰리즘과 다수결 원칙 두 가지 취약점을 갖고 있다. 포퓰리즘은 정치인이 선거 때 국민이 원한다고 생각해 추진하는 것으로 옳지 않을 때가 많다. 리더들은 민주주의의 적이라 할 수 있는 포퓰리즘을 터치하지 말아야 하고, 그것이 열리면 판도라 상자와 같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 원칙은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제도다. 국민의 기본 권리를 침범하는데도 다수결을 앞세워 막 밀어붙이면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져 버린다. 포퓰리즘과 절대적 다수결 원칙을 최대한 억제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그나마 법치주의가 가능하다.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취약점을 해결할 방안은 사법부와 관료, 검찰, 언론, 시민단체, 학계 등이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의 독립이다.”

―국가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네 가지 덕목을 갖춰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게 대통령의 제1 덕목이다.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 중 국민이 다 좋아하는 정책만 있을 수는 없으나 신뢰를 받아야 한다. 논어 자장편에 ‘지도자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이끌면 국민은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여긴다(未信則以爲?己也·미신즉이위려기야)’는 경구가 있다. 둘째, 방법론적인 문제인데 대통령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개 분야에 대해선 확실히 디테일한 철학과 지식을 가져야 한다. 디테일이 없으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셋째, 집행력이 강해야 한다. 넷째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한·미 FTA 체결 지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감회가 남다를 텐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안 계셨으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는 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어젠다를 가지고 매일 챙기지 않으면 될 수 없는 사안이다. 쇠고기 문제는 완전히 해결 못 했으나 상당 부분 합의점에 이르렀다. 득을 본 게 많았으나 양보한 것도 있었고, 우리나라가 그렇게 개방을 광범위하고 철저히 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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