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리더만이 세상 변화 시켜
국민 88%에 재난지원금 지급 결정
왜 88인가… ‘숫자 마케팅' 납득안돼
우리는 재난과 그 피해자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는 리더보다는 냉정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리더를 원한다. ‘뼈를 깎는 고통’과 같은 과장된 비유적 표현은 차마 못 미덥다. 수전 손택의 말대로 ‘타인의 고통’을 진정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위직 관료나 자산과 권력을 지닌 정치인이 소상공인이나 실업자의 고통을 진정 알 수는 없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온전한 공감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고통에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뜻이다. 관료와 정치인은 국민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감성적 담론을 내놓기 이전에, 타당한 정책을 실현시키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타주의는 냉정할 때 힘을 발휘한다. ‘냉정한 이타주의’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타심의 한계는 또 있다. 이타심은 그 주체를 영웅화시킨다. 영웅화는 나르시시즘의 단면이다. 나르시시즘으로 충만한 리더가 국민의 형편을 살필 수는 없다. 나르시시스트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삶이 개선된 것에 기뻐하기보다, 그런 행위를 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비난과 비판에 취약하다. 이 때문에 그 이타적 행위는 자의적이고 편향성을 띠게 된다. 정치 리더의 맹목적인 이타심은 국민에 대한 차별과 역차별을 동시에 발생시키며 이는 국민을 분열시킨다. 냉정한 이타주의만이 영웅화의 덫에 걸려들지 않게 해주며 공정한 이타적 행위로 이어질 수 있게 한다.

영화 ‘칠드런 액트’는 이타주의가 어떻게 궤도를 벗어나는지를 보여준다. 판사는 17세 소년의 인생에 개입한다. 판사는 그 소년의 사건에 대해 법원에서 판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입원해 있는 그 소년을 만나러 직접 병원으로 들어선다. 판사는 소년의 감성에 호소하고 그를 감동시키며 그의 신념에 영향을 미친다. 판사의 이타적 행위로 소년은 생명을 되찾는다. 부작용이 남는다. 이 일로 판사는 ‘성취’를 얻었지만 소년은 ‘의존’을 얻는다. 판사에게 그 사건은 ‘종결’됐는데, 소년의 인생은 이제 ‘시작’이다. 소년은 자신에게 ‘시작’을 준 판사에게 집착하기에 이른다.
판사는 ‘개인’으로서 온정적인 이타심을 발휘하는 것을 경계했어야 했다. 판사의 행동은 선의였으나 소년에게 혼돈을 남겼다. 그 혼돈에 대한 해결책 또한 판사가 줄 수 있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판사는 소년에게 자립을 이야기했지만, 소년은 자립을 이야기한 그 판사로 인해 자립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소년의 집착에 지친 판사는 나한테 왜 이러느냐고 다그친다.
소년은 대답한다. 그 대답에 ‘진실’이 담겨 있다. “그때 왜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렇게 친한 척, 왜 저에 대해 그렇게 물으셨어요?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하고, 그냥 판결만 하지 왜 내 인생에 끼어들어요? 그래 놓고 그냥 가라고요? 왜 나한테 그랬어요?” 판사는 냉정하지 못했다. 이타심으로 한 행동이지만 온정적인 이타심은 그 순간에만 작동했고, 그 이후를 보지 못하게 했다. 온정적 이타심이 맹목을 만든 것이다.
냉정한 이타주의가 절실한 시대다. 냉정한 이타주의는 ‘냉정’과 ‘이타주의’만으로 충분치 않다. 냉정해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고통이 뒤따른다. 섣불리 선의와 온정으로 치닫고 싶은 마음을 눌러야 하며, 그것이 온전히 냉정한 이타심인지 끊임없이 자기검열해야 한다. 불확실과 싸우고, 세상의 편견을 감내해야 한다. 대중은 냉정한 리더를 용납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온정적 이타심은 쉽고 칭송되지만 냉정한 이타주의는 어렵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
코로나 재난 상황에서 맹목적 이타주의는 더 큰 문제를 만든다. 재난이라는 것이 ‘피해자 정체성’을 확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가지고 집단을 형성하면, 역설적으로 이 세력이 또 다른 권력이 된다. 이 아이로니컬한 피해자 권력에 정부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때문에 목소리조차 갖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사각지대에서 희생된다. 진짜 피해자는 침묵 속에 있다.
이 재난 상황에서 국가가 반드시 지원해야 할 국민은 누구인가. 국가가 빚을 내서 국민에게 피해 보상을 하는 사이, 미래의 자원을 약탈하는 것은 아닐까. 지원금 대상으로 소득 하위 80%가 맞는지, 88%가 맞는지 논쟁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전국민 대상 지원금을 통과시키기 못했다는 여당의 사과는 누구에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지자들에게 한 것이라면 국민을 분열시킨 것이고, 국민에게 한 것이라면 여론을 곡해한 것이다.
왜 ‘88%’로는 합의가 가능했는지, 혹시 ‘88’이라는 수치가 갖는 ‘앵커링 효과’가 작용한 것은 아닌지 의혹이 생긴다. 우리에게는 ‘88올림픽’과 ‘88만원 세대’라는 사건과 개념이 각인돼 있다. ‘88’은 익숙한 기준점이 된다. 그 익숙함이 판단의 왜곡과 편파적인 결정을 하게 만든다. 근거는 없고 합의만 있다. 정부가 상징적인 숫자를 이용해 국민을 설득하는, 일종의 ‘숫자 마케팅’을 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이겠지만 왜 ‘88’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코로나 팬데믹이 끝이 아니라면, 주기적인 바이러스의 시대 엔데믹이 시작된 것이라면, 정부는 그럴 때마다 얼마간의 지원금으로 미봉할 것인가. 코로나로 인해 경제적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지원금을 준다는 것은 맹목적 이타주의로 보인다. 맹목적 이타주의는 진정한 ‘이타’가 아니다. 맹목적 이타심은 결국 자신의 성취감과 영향력 행사를 위한 자기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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