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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여인들과 항아리’… 한국미술 걸작 실물로 만나다

입력 : 2021-07-22 19:36:41 수정 : 2021-07-22 19: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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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피란길에 그린 이중섭의 ‘가족과 첫눈’
요절 천재화가 김종태의 ‘사내아이’
1세대 서양화가 백남순 ‘낙원’도 나와
“작가와 작품 설명 거의 없어 아쉬움”
국립현대미술관이 ‘MMCA이건희컬렉션 특별전:한국미술명작’ 전시를 열고 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개막 첫날인 지난 21일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관람객들 뒤로 김환기 화백의 대형 작품 ‘여인들과 항아리’가 보인다. 연합뉴스

“1973년 2월19일 올해 처음 큰 캔바스 시작하다. 3월11일, 근 20일 만에 307번을 끝내다. 이번 작품처럼 고된 적이 없다. 종일 안개비 내리다.”(김환기 일기 중)

김환기의 뉴욕시절 점화 양식 완성단계를 보여주는 ‘산울림 19-Ⅱ-73#307’은 이렇게 탄생했다. 지금 이 작품은 미국의 색면추상과 차별화되는 동양적, 시적 추상화 세계를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김환기 작품은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지난 21일 시작된 ‘MMCA이건희컬렉션 특별전:한국미술명작’ 2부에 걸려 있다.

주제는 한국, 소재는 명작이다. 한 개인이나 어떤 주제를 따라 주·조연들이 힘을 합쳐 기승전결을 이루고 메시지를 전하는 여느 전시와는 다르다. 수집가 뜻이 담긴 컬렉션을 보여준다는 전시 계기, 그 수집가가 최고의 재력과 문화에 대한 신념을 가졌던 ‘이건희 회장’이라는 점이 한국의 명작, 명작으로 된 한국이라는 전시를 가능하게 했다. 기승전결도 주·조연도 구분 없이 모든 작품이 주인공이자 하이라이트다. 전채부터 후식까지 스테이크로만 된 코스요리를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 1488점 중 근대작품 위주로 58점을 먼저 선보이는 전시다.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작가들 의지로 한국 미술의 근간, 정수가 된 작품들이다.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소는 조선 민중의 상징물로 여겨져 일제강점기 암암리에 금기시됐던 소재이나 이중섭은 더 당차게 소 연작을 그려냈다. 전쟁을 겪고 피란길을 떠돌면서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평온을 소망하며 나온 작품이 이중섭의 ‘가족과 첫눈’, 장욱진 ‘나룻배’ 등이다. ‘가족과 첫눈’은 이중섭이 함경남도 원산에서 제주까지 피란을 와 외양간 신세까지 졌다가 겨우 초가집에 정착한 뒤 그린 작품이다. ‘나룻배’는 장욱진이 피란길에 직접 품에 안고 다닐 정도로 소중하게 여긴 작품이며, ‘마을’은 전쟁 시기 캔버스를 구하지 못해 종이에 유화로 그린 작품이다. 소박한 초가집과 가족, 어린이들이 소재로 등장하는 그림들에서 평화를 향한 간절함이 전해진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길 꿈꾸며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던 박수근은 그의 삶 자체가 한국의 정신이다.

김종태 ‘사내아이’

희귀작들도 컬렉션의 수준을 보여준다. 요절한 천재화가로 불린 김종태 작품은 단 4점만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인 ‘사내아이’가 전시장에 있다. 보통 서양 유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리나 작가는 졸고 있는 아이 모습을 순간 포착해 동양화의 일필휘지처럼 그려냈다. 이중섭의 붉은 황소 역시 현존작은 4점뿐이다. 그 가운데 전시된 적이 거의 없는 붉은 황소가 이번 전시에 걸렸다. 1세대 서양화가 백남순의 ‘낙원’을 두고 박미화 학예연구관은 “1970년대 뉴욕으로 이주하기 전 작품으로 유일한 현존작”이라고 설명했다.

수집가의 존재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는 1950년대 조선방직을 인수해 국내 최대 방직 재벌 기업가가 된 삼호그룹 정재호 회장이 퇴계로에 자택을 신축하며 작가에게 주문한 작품이다. 파스텔톤 색면 배경 위에 유난히 풍요롭고 장식적인 요소들이 그려진 이유도 그 때문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말 삼호그룹이 쇠락하면서 미술시장에 나와 이건희 컬렉션으로 가게 됐다. (캔버스 크기) ‘2000호’짜리 그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인 초대형 작품이 나온 배경이다.

기증 덕에 한층 풍부해진 자료를 바탕으로 여성 화가들이 발굴되고 있다는 점도 반갑다. 희귀한 만큼 회자되기 어려웠던 백남순을 두고 미술관 관계자는 “그 시대 여성 화가가 나혜석 하나인 줄 아는데 지난해 박래현, 올해는 백남순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전시장에 입장하면 ‘낙원’을 필두로 무릉도원을 그린 작품들이 관람객을 차원이 다른 이상향의 세계로 안내할 듯한 기세다. 3부로 이뤄진 전시는 1부 ‘수용과 변화’에서 새로운 문물을 맞이한 미술계, 2부 ‘개성의 발현’에서 격동의 시기 작업을 멈추지 않은 작가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 속에서 일군 한국 미술의 토대, 3부 ‘정착과 모색’에서 전후 복구 시기 작가들이 국내외에 정착하며 만들어진 다채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3부 류경채의 ‘가을’, 문신의 ‘닭장’ 등은 1950년대 작품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 세계 미술시장에서 유행하는 서구 작가들보다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이다.

걸작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건 더 없는 호사임에 틀림없지만, 이번 전시는 하이라이트들이 맨몸으로 나와있는 느낌이 든다. 촉박한 준비 시간 탓이 컸으리라 짐작되지만, 전시를 풍성하게 하는데 필수인 작가와 작품 설명, 아카이빙이 거의 없다. 마치 옥션 전시장처럼 보인다. 전시 초입, 벽면에 쓰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어록은 제대로 편집되지 않은 채 중복돼 붙어 있다.

백남순 작품 설명도 혼란을 준다. 그림 설명에는 ‘남편 임용련과 파리에서 돌아온 후 평북 정주에 정착해 제작한 백남순의 유일한 현존작’이라고 돼 있고, 도록에는 ‘해방 이전 제작된 작품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림’으로 설명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남순 인물설명을 보면, 백남순은 1931년 평북 정주에 정착했고, ‘낙원’은 ‘삼성미술관 소장’이라 기록돼 있다. 축제가 끝나면 숙제가 시작된다. 내년 3월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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