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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미칼럼] 통일은 어쩌다 천덕꾸러기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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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7-20 23:30:09 수정 : 2021-07-20 23: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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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의 통일부 폐지론은 섣부른 발상
국가 미래 좌우할 통일담론 실종이 문제

지난 1월 한국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해리 해리스 전 주한 미국 대사는 문재인정부에서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지난해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취임 직후 해리스 전 대사를 만났을 때도 “남북관계를 평화와 경제 공동체, 생명 공동체로 발전시켜야 한다”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방점을 찍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관계 개선은 당연히 필요한 수순이지만, 그 궁극적 목표인 통일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게 대북 정책 핵심 파트너인 미국 고위 당국자 눈에 이상하게 비친 것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의장인 대통령이나 주무장관인 통일부 장관이 구체적인 통일론을 펼친 적이 없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작업이 통일보다 우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남북, 남남 갈등을 피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대통령 멘토인 문정인 전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한 토론회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미국과 같이 가는 것, 중국에 편승하는 방법이 있고, 우리가 통일을 해서 중립국으로 가거나 핵무장을 한 강력한 중견국가가 되는 홀로서기가 있을 수 있다. (미·중 간) 줄타기 외교를 할 수도 있다.” 그는 현실적으로 줄타기 외교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부연했지만 핀란드식 중립화나 ‘홀로서기’를 문정부가 내심 추구하는 건 아닌지 짐작됐다.

황정미 편집인

북한을 향해서는 “흡수통일은 없다”고 천명한 정부가 국민들에는 ‘남북 구성원이 합의하는 열린 통일’과 같은 모호한 말만 한다. 당장 통일이 이뤄질 가능성이 작다는 것과 우리가 어떤 통일을 추구하는지 분명히 하는 건 다른 문제다. 북한이 한번도 흔들리지 않고 대남 적화통일 노선을 고수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실제 헌법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시해놓았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작은정부론을 들어 통일부 폐지를 주장한 건 섣부른 발상이다. 젊은 세대에서 통일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됐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줄줄 외는 세대와는 다르다. 30대 보수 야당 대표의 통일부 폐지론은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이어야 할 통일에 관한 안이한 인식을 키울 뿐이다. 박근혜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처럼 통일 정책은 정권과 무관하게 축적돼야 한다. 김대중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출신으로 통준위 사회문화분과위원장을 맡았던 김성재 교수는 “레드 콤플렉스가 없는 보수 정권에서 남북관계 진전이 이뤄져야 한다. 독일 통일도 보수정권인 헬무트 콜이 한 것”이라고 했다.

남북 최고책임자가 한반도 평화통일 원칙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한 게 노태우정부 때다. 통일의 전기를 마련하려면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와 외교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북방정책이 뒷받침됐다. 당시 탈냉전 기류가 영향을 미쳤지만 주류인 보수 정부가 기치를 들었기에 큰 내부 갈등 없이 추진할 수 있었다. 통일부 폐지론이 가벼운 농담처럼 회자되는 현실을 보면서 “통일 없이는 선진화도 없다”며 선진통일강국론을 설파했던 보수 진영의 이데올로그, 고 박세일 서울대 교수를 떠올렸다. 그는 몇년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방관하다가 38선이 휴전선이 아니라 국경선이 되는 게 두렵다”고 했다. 그렇게 반토막 난 나라로는 젊은 세대에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대한민국을 만들려면 대륙을 향해 뻗어나갈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게 그의 논지였다.

통일을 말하지 않는 정부나, 북한 눈치 보는 통일부는 없는 게 낫다는 식의 사고는 사실상 분단 상황에 안주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 통일’ 정책을 주도하는 통일부를 만드는 게 차기 정권의 일이다. 미국의 보수주의자 러셀 커크는 국가는 나무와 같아서 가지를 쳐낼 수는 있어도 뿌리에 도끼질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국가 미래를 책임지는 정치인이라면 가지와 뿌리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특정 조직의 존폐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체성을 좌우할 통일담론의 실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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