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철’ 피하고 가족과 있는 시간 느는 등
장점 경험한 근로자들 유연성 포기 못해
美 노동시장 ‘재택근무’ 찾아 대이동 시작
인재 채용 쉬워지고 사무실 관리비 감축
생산성 유지 땐 기업에도 꼭 나쁘지 않아
“일은 사무실서 해야”… 금융회사들 부정적
골드만삭스 CEO “바로잡아야 할 일탈”
결국 지난달 직원들 사무실로 복귀시켜
구글·아마존·애플은 ‘하이브리드’ 선택
사무실 출근·원격근무 혼합 형태 대세로

전 세계는 지난해 봄부터 본의 아니게 재택·원격근무 실험을 진행했다. 코로나19 대유행 위기와 각종 봉쇄령 속에서 기업 활동을 이어가려면 부득이한 일이었다. 감염병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장소인 집이 곧 일터가 됐고, 각종 화상회의 프로그램 등 정보기술(IT)의 발달이 이를 지원했다.
1년여가 지난 이제 각 사업장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직원들을 다시 사무실로 불러모을 것인가, 아니면 재택근무를 계속 허용할 것인가.’ 백신 접종에 힘입어 마스크를 벗고 각종 거리두기 지침을 완화한 미국을 비롯해 영국, 독일 등 각국이 공통으로 직면한 고민이다. 백악관 직원들이 오는 6일(현지시간)부터 순차적으로 사무실 출근을 재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구글, 페이스북 등 주요 기업들도 향후 근무지침을 잇달아 확정해 발표했다.
◆재택근무 일자리 찾아…美 노동시장은 격변 중
고민에 빠진 것은 고용주들뿐만이 아니다. 재택근무를 경험한 노동자들은 출근 재개를 앞두고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사무실 출퇴근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재택근무를 허용하는 곳으로 직장을 옮길 것인가.’
노동자 입장에서 재택근무의 장점은 명확하다. 출퇴근시간대 ‘지옥철’을 피할 수 있다는 점만 해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대면 접촉을 꺼리게 되는 코로나19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자연스레 늘어난다. 대유행 초기 육아 등을 이유로 직장을 그만둬야 했던 워킹맘이 많았는데, 재택근무는 적절한 대안이 된다.
대유행 기간 재택근무를 통해 확보한 유연성을 많은 노동자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메어리드 오코너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경영대 교수는 “노동자들은 주중 오후 5시(호주의 퇴근시간) 전에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 대신 밤과 주말 근무시간이 극적으로 증가했다”며 “경영진도 이런 현상을 이미 눈치챘다”고 말했다.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학기술 전문가 알렉산드라 새뮤얼은 WSJ에 “부서장들도 이제 일주일에 5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사이 사무실 책상에 붙어 있느냐가 아닌 업무 성과를 기준으로 부하 직원을 관리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강조했다.
미국 노동시장에서는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자리를 찾아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 5월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39%는 고용주가 재택근무에 유연하지 않으면 퇴사를 고려하겠다고 답했다. 미 노동부는 지난 4월 직장을 떠난 미 노동자 비율이 2.7%로 200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인터넷매체 복스는 “구인난과 사직 붐 속에서 재택근무가 엄청난 매력을 끌고 있다”며 “일각에서는 재택근무 가능성이 급여 인상보다 더 높게 평가되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 최대 구인·구직 소셜미디어 링크트인에 올라온 재택근무 가능 일자리는 지난해보다 5배가량 늘었다. 그래도 전체의 약 10%에 불과한데, 입사 지원서의 4분의 1이 이들 일자리에 몰렸다. 한 미국 구인 사이트 관계자는 “매장, 사무실, 창고 안에서 일해야 하는 자리는 구직 경쟁이 거의 없다”고 했다.
생산성만 유지할 수 있다면 기업 입장에서도 재택근무가 꼭 나쁘지만은 않다. 지역 간 경계를 초월해 인재를 채용하기가 보다 수월해지고, 임대료 등 사무실 유지·관리비용도 줄일 수 있다. 직원들이 가정에 사무공간을 구축할 수 있도록 노트북, 모니터, 책상 등을 보내주는 기업까지 등장했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대기업의 9%가 향후 3년 내 사무실 규모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했고 72%는 ‘약간’ 줄 것이라고 답했다.
영국 아웃소싱 기업 캐피타는 일부 직군에 재택근무를 허용함에 따라 사무실 규모를 올해 말까지 4분의 3으로 축소하기로 했다.
독일 소프트웨어 업체 SAP는 지난달 1일 직원 10만명에게 이메일을 보내 “100% 유연하고 신뢰에 기반한 일터를 예외가 아닌 표준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사무실에서 일하든 집에서 일하든 전적으로 직원들 선택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이 회사의 최고마케팅솔루션책임자(CMSO) 줄리아 화이트는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에 “우리의 새로운 접근법은 인재를 채용할 때 큰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이직한 미국인인 화이트는 그 자신이 싱글맘으로서 “유연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일은 사무실에서 해야…”
재택근무에 부정적인 태도는 주로 금융·투자업체들이 취하고 있다.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솔로몬 CEO는 지난 2월 일찌감치 재택근무를 한시 빨리 바로잡아야 할 “일탈(aberration)”이라고 언급하며 출근 재개 방침을 시사했다. 그는 지난해 뉴욕 외곽 휴양지 햄프턴의 한 식당에서 식사하다가 말단 직원과 마주친 일을 언급하며 “직원들이 재택근무의 특권을 남용하고 있다”고 우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지난달 중순 골드만삭스의 미국 직원들은 사무실의 자기 자리로 복귀했다. 6000명의 영국 직원들은 봉쇄 단계가 전면 해제되면 다시 런던 사옥으로 출근하게 될 전망이다. 모건스탠리의 제임스 고먼 CEO 역시 “집 밖 식당에 가는 걸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무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특히 신입 직원에 대한 도제식 교육의 대안이 없는 점을 걱정한다. 고먼 CEO는 “사무실은 은행가들이 기술을 배우고 다양한 커리어를 쌓은 곳”이라고 했고,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CEO는 재택근무로 말단 직원을 위한 멘토링이 약화하는 것을 우려했다. 바클레이즈의 제스 스테일리 CEO는 “신입 행원들은 동료와의 대면 접촉을 통해 은행의 문화와 가치를 흡수해야 한다”며 재택근무에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전했다.

노동자 중에도 재택근무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이들이 있다. 업무의 종류·성격보다는 집안에 근무 여건을 갖출 형편이 되는지가 성패를 가른다. 대유행 기간 도심을 피해 한적한 휴양지로 떠나 일을 하거나 아예 교외에 넓은 집을 새로 장만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족들로 북적이는 작은 집에서 변변한 자기 책상도 없이 가사와 보육을 병행하며 일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다름슈타트 공과대학이 독일 전역의 사무직 노동자 952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3분의 1 이상이 “집에서 일할 때가 덜 생산적이었다”고 답했다고 DW는 전했다. 특히 동료와의 직접 소통 부재, 직장 선배로부터 일을 배우거나 경력을 쌓을 기회 축소, 회사·업무에 대한 동질감 상실 등으로 재택근무를 힘들어하는 경향이 젊은 노동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났다. 다름슈타트 공대 연구진은 “재택근무 여부는 개별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잘못하면 재택근무가 노동자들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눌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이브리드’로 절충 택한 구글·아마존·애플
대세는 하이브리드(혼합) 근무 형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주 5일 가운데 이틀이나 사흘 정도는 출근하게 하되 나머지 시간은 원격근무를 허용하는 탄력적 방식이다. 직원 교육, 협업, 기업문화 강화의 계기 마련을 위해 최소 며칠은 팀원들을 공동 업무공간에 배치하는 절충안을 찾은 것이다.
도브 비누, 벤앤제리 아이스크림 등의 브랜드를 소유한 소비재그룹 유니레버의 앨런 조프 CEO는 주 5일 내내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은 “매우 낡은 방식”이라며 절대 과거로 회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화상회의, 원격근무를 DNA에 새기고 있을 것만 같은 테크기업들도 뜻밖에 상당수가 하이브리드 방식을 택했다. 구글은 주 3일(화∼목)은 회사로 나가고 나머지 이틀은 직원들이 자유롭게 편한 업무공간을 택할 수 있도록 한 정책을 9월부터 시행한다. 아마존과 애플의 정책도 이와 유사하다. 페이스북은 업무 성격만 맞는다면 모든 정규직이 재택근무를 해도 된다고 했다. 다만 마크 저커버그 CEO가 50% 정도는 집에서 일하겠다고 밝힌 만큼 직원들도 이와 비슷한 수준에서 재택과 사무실 근무를 병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들은 하이브리드 근무에 대비해 사무공간 재정비에 착수했다. 직원들이 출근하는 날에는 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개인 책상은 줄이고 공유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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