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도 좋지만 ‘소확행'에 시간·열정 더 써야

일이 서툴렀던 레지던트 1년차 때였다. 교수님께서 “해야 할 일들을 시급성과 중요도 매트릭스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해 봐. 일의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정해질 거야. 시급하면서 중요한 일이 첫 번째, 중요하지 않아도 기한 내에 처리해야만 하는 것은 그다음. 이 순서에 맞춰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어”라고 하셨다. 지금이야 쉽게 들을 수 있는 자기 관리법이지만 의대를 갓 졸업한 사회 초년병이던 그때의 내게는 인상 깊은 교훈으로 남았다.
진료와 연구로 시간에 여유가 없으셨을 텐데도 그분은 항상 단정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근무하셨기에 ‘나도 저 교수님 같은 스타일의 의사가 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가르쳐 주신 ‘투두리스트’의 우선순위 결정법을 따라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나는 허둥지둥하며 해야 할 일을 놓치곤 했다. 시급성과 중요도에 따라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기술은 잘 늘지 않았다. 급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중요한 것에 시간을 뺏기고 났더니 가르침을 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긴급하고 중요한 일처리는 생존에 필수다. 계약된 기한에 맞춰 마감하기, 정해진 시간에 상사에게 보고서 제출하는 것, 기말고사 시험공부 같은 활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제대로 못 하면 삶에서 큰 낭패를 겪게 된다. 그러니 이 영역에 시간과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은 기운을 우리는 대체로 시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에 쓴다. 제때 안 하면 성가신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기한 내에 공과금 납부하기, 신용카드 결제 대금 제때 갚기, 늦게 하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빨래와 설거지 같은 것들이다.
이 두 가지 영역에 해당하는 일을 처리하느라 녹초가 되어 버리면 더 이상 뭔가를 할 수 없게 된다. 시간 여유가 생겨도 에너지가 없으니 손쉬운 위안만 찾는다. 술을 마시거나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넋 놓고 있게 되는 것이다. 일상이 이렇게 흘러가면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공허하지?’라는 의문이 벌칙처럼 따라붙는다.
따지고 보면 인생의 행복은 시급하게 완료할 필요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는 활동을 할 때 찾아온다. 뭐가 있을까? 시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에 끌려 하는 공부, 논술을 위한 책읽기가 아니라 공감하기 위한 소설 읽기,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음악 감상 같은 것이다.
당연히 운동도 여기에 해당한다. 하루 이틀 안 한다고 탈 나지는 않지만 운동은 삶을 지탱하는 힘을 키워준다. 절친과 수다 떨기, 연인에게 편지 쓰기도 그렇다. 빨리빨리 해결할 필요는 없지만 계속 미뤄두고 하지 않으면 ‘잘 살고 있다!’는 충족감을 느낄 수 없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고, 마감에 쫓기면 이런 활동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끝내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간다. 나중에서야 ‘아, 내가 이러려고 열심히 살았나!’하며 후회에 빠지고 만다.
예전에 그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시급성과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것에 맞춰 일했더라면 세속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크게 성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만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짜릿한 성취도 좋지만 안온한 충족감을 더 많이 느끼고 싶다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활동에 시간과 기운을 더 많이 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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