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춘문예에 소설과 시가 동시에 당선되며 비범함을 알린 작가, 예리한 현실인식과 탐미적 감수성의 작품 세계, 동인문학상과 김동리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 네 차례나 투옥되며 민주화의 한 복판에 섰던 인생, 명상 등에 탐닉하며 바람처럼 살아온 후반의 삶….
송기원 작가가 8년 만에 장편소설 『숨』(마음서재)을 펴냈다고 했을 때, 그를 만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파란만장한 50년 문학 인생을 온몸으로 헤쳐온 그 아니었던가.
더구나 ‘명상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작품 역시 심상치 않았다. 바이러스 백혈병으로 딸을 먼저 떠나보낸 화자가 초기 불교의 수행법인 사마타(선정을 위한 명상)와 위빠사나(지혜를 위한 명상)를 통해 죄의식과 상실의 고통을 뛰어넘어 평온에 이르는 구도 소설이자, 명상하는 아버지의 시선과 이승을 떠나 중음신으로 떠도는 딸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과거를 회상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자전적 작품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는 ‘아나빠나 사티’를 시작으로 색계 사선정, 몸의 32부문에 대한 명상, 죽음 및 자애심 명상, 4대 명상, 깔라파 명상 등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명상 문외한들조차 손에 땀을 쥐게 몰입시킨다.
아무 때나 내려오라는 말을 듣고 그가 사는 곳을 지도에서 찾아보니, 남도의 끝자락 해남에 위치한 ‘백련재 문학의집’. 조선시대 윤선도는 물론 현대 시인 김남주, 고정희, 황지우의 고향인 해남군이 2019년부터 운영하는 작가 레지던스 공간이었다. 까마득한 것도 잠시.
하늘이 마치 청포 같던 지난 18일 아침, 서울에서 해남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놓치고 광주를 거쳐 해남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휴게소에서 전화를 한 뒤 해남에 도착해 택시를 잡아타고 푸른 논밭을 가로질러 백련재로 들어섰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문학의집 입구에 서자, 그가 난실 앞마루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왜 지금 멀고도 먼 이곳에서 우주를 바라보거나 마음속 광명으로만 내달리고 있는 것일까. 사진 몇 장을 찍고, 입주 작가들이 함께 쓰는 거실에 마주 앉았다. 곧이어 파란만장한 삶과 문학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그는 말이 어눌했고, 숫자와 이름을 자주 기억해내지 못했다.

―8년 만에 장편 소설을 펴냈는데, 왜 이 소설을 써야 했는가.
“(책을) 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중에 꼭 필요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놈의 욕심 때문에 내게 됐다. 4, 5년 전쯤 쓴 뒤 처박아 놓고 있었는데,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이를테면, 죽을 때가 다되면 마음이 약해져 이것 하나는 쓰고 죽고 싶다는 심정이었달까. 근본으로 가서 자기 자신에게 자유로워질 것인가, 하는 것이 소설의 질문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소설은 필요도 없고 발표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도 “이승에서 마지막 업을 지우는 일”이었다며 “인연이 되어 책을 펼치는 이들이 있다면, 한두 번이 아니라 열 번, 백 번을 펼쳐서 그이들 깊은 곳에 못박힌 고통까지 녹아나게 되기를”이라고 적었다.
―구체적인 집필 동기나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옛날 인도나 미얀마, 스리랑카 등 동남아시아를 간 적이 있는데, 미얀마가 불교국가여서 그런지 명상 시스템이 잘 돼 있었다. 산속에 명상센터 등이 있었고, 숲 속에는 꾸띠라는 오두막집이 있어 혼자 살기 좋게 해놨더라. 10여 년 전 죽은 둘째 딸이 마지막으로 앓았던 병의 단계가 ‘섬망’이었는데, 섬망 비슷한 상태를 명상의 선정으로 재현하기 위해 미얀마 명상센터를 찾아갔다.”
햇살이 병실을 밝게 비추던 어느 겨울날 오후 2시, 간호사가 들어와 딸의 이름을 불렀다. 딸을 혼자 힘들게 보내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옆에서 책을 읽던 그는 좀 깊이 잠들었나 봐요, 라고 딸 대신 대답했다.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현 듯 딸 코끝에 손을 가져다댄 뒤 후닥닥, 병실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서 딸의 마지막을 놓치다니, 이건 아니야. 이른 봄, 그는 남해안 일대에 딸의 유골을 뿌렸고, 이후 세상을 부유했다.
―딸의 죽음에 자책을 많이 한 것으로 나오는데.
“저는 애초에 둘째 딸을 지우자고 했다. 게다가 그 무렵, 워낙 얽매이는 삶을 싫어해서 밖을 쏘다니면서 집을 등한시 했다. 염세라고 할까. 아내와 큰 딸은 음악을 하는데, 둘째 딸이 미술을 하면서 갈등도 좀 있었고. 사실 초고를 쓸 때는 모든 가족이 나왔는데, 아내와 큰 딸이 빼달라고 해 둘째딸만 나온 것이다.”
작품은, 그러니까, 더 이상 단순한 소설이 아닌 셈. 박규리 시인이 추천사에서 “이 책은 살아서 두 눈 부릅뜬 채 중음(사람이 죽은 뒤 다음생의 몸을 받아 날 때까지의 영혼 상태)의 딸과 함께 그 아득한 바르도를 찬연하게 건넌 한 아비의 지극한 천도재”라고 쓴 이유다.
―명상은 언제부터 했는가.
“둘째 딸이 죽은 뒤에 미얀마의 파욱명상센터에 가서 1년간 명상을 했다. 학교 공부식으로 초기 불교의 수행법인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공부했다. 나중에 절에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것을 듣고 책도 읽고는 했다. 요즘은 (명상을) 거의 안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조금 설명해달라.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초기 불교와 소승 불교의 수행법인데, 서로 약간 다르다. 사마타는 빛을 보는 선정을 통해 감각이나 사고를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 버리는 것으로, 감각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탐진치라거나 짜증 등 자체가 없어진다. 빛만 있고 내가 없어지면서 선정으로 들어간다. 약간 바보처럼 믿고 쑥 들어가면 되는데,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거나 알음알이가 있으면 빛으로 가는 것을 차단시켜버린다. 체계적인 명상은 현재 사마타밖에 없는 것 같더라. 반면 위빠사나는 알아차려서 지혜가 열리는 것으로, 알아차림을 해야 하니 선정으로 들어갈 수 없다. 위빠사나는 지혜로 안다는 측면에서 선불교의 화두선과 비슷하다. 다만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불교가 넘어올 때 사마타가 없어지고 공이라든가 무위 사상 등이 섞여 중국식 선불교가 들어온 것 같다. 우리 선불교는 주로 화두선인데, 일본의 경우 묵조선이 많고 화두선이나 염불선도 있다.”

―종교나 단체 등에 따라 명상이나 참선, 기도 등 종류도 다양한데.
“기독교의 기도, 혼자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것도 일종의 명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도를 통해 명상으로 들어가니까. 책에는 쓰지 않았지만, 제가 갔던 명상센터에 한국에서 온 목사 몇 분이 있더라. 존경스럽게 보였다. 이슬람 같은 것도 그렇고, 선불교의 참선 역시 명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명상의 타래가 풀리자, 그의 이야기는 종횡으로 내달렸다. 석가모니 부처의 호흡법과 부정관, 불교의 화두선과 묵조선 및 염불선, 선불교의 돈오후수와 정혜쌍수, 한국의 화두선과 일본의 화두선, 인도와 티벳의 호흡법, 도교의 피부호흡법…. 그리하여 회광반조의 질문으로 달렸다가 멈추는데. “몸이 있는가?/ 또는 몸이 없는가?/ 이것이 나냐?/ 또는 내가 아니냐?”(321쪽)
1947년 전남 보성의 조성장터에서 태어난 송기원은 중학교 2학년 때 유서를 쓴 뒤 공동묘지 옆의 늙은 소나무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정도로 남다른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책에는 “얼굴조차 모르는 노름쟁이에다 아편쟁이인 건달의 사생아라거나, 오일장을 떠돌며 미역이나 멸치를 파는 가난한 장돌뱅이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출신성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는지 모른다”(11쪽)며 운명의 굴레를 묘파했다.
―어떻게 해서 문학의 숲, 작가의 길에 들어왔는가.
“제가 광주 조대부고 1학년 때에는 데싱만 열심히 하는 미술부 소속이었다. 어느 날 광주사직공원에서 초중고 학생들이 참여하는 호남예술제가 열렸는데, 심심해서 글을 끄적끄적해 써냈는데 상을 받았다. 글짓기로 상을 받았다고 미술부에서 ‘줄빠따’를 맞고 쫓겨났고, 대신 문예부에서 오라고 해서 문예부에 들어가며 문학의 세계로 들어왔다. 서라벌예대가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으로 뽑혀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서정주 선생에게서 시를 배웠기에, 대학 다닐 때에는 소설을 쓸 줄 몰랐다.”
문학은 당시의 그에게 거의 유일한 무기였다고 한다. 삶의 무게를 이데올로기화해서 위장시켜줬으니까. “문학은 내가 여전히 더러운 피를 간직한 채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와도 같았다. 나는 더러운 피라는 직설적인 어법 때신에 탐미주의라거나 퇴폐주의, 반도덕주의, 그리고 위악주의라는 간접적인 어법으로 내가 짊어진 짐의 무게를 이데올로기화했다.”(12쪽)
송기원은 197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경외성서」가, 『동아일보』에는 시 「회복기의 노래」가 동시에 당선돼 화제가 됐다. 비범한 출발임에도 그는 심상하게 말한다. “돈 놓고 돈 먹기지, 뭐. 아무거나 되라, 하고 냈는데, 둘 다 돼버렸어.”
등단 이후 소설집으로 『월행(月行)』(1979), 『다시 월문리에서』(1984), 『인도로 간 예수』(1995), 『사람의 향기』(2003), 『별밭 공원』(2013) 등을, 장편소설로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1994), 『여자에 관한 명상』(1996), 『청산』(1997), 『안으로의 여행』(1999), 『또 하나의 나』(2000) 등을 펴냈다. 그 사이 동인문학상과 오수영문학상, 대산문학상과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문학 세계나 전개를 조금 설명해 달라.
“우리 현대 문학은 내면을 추구하는 모더니즘과 시대나 세상에 천착해 발언하는 리얼리즘으로 대별할 수 있을 텐데, 저는 양쪽 모두 불만이었다. 리얼리즘은 시대만 있지 깊이가 없어 보였고, 인간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모더니즘의 경우 넓이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넓이가 없는 듯했다. 저는 처음 리얼리즘 쪽이었지만, 징역을 다녀오고 나이가 들면서 내면을 추구하는 쪽으로 갔다. 내면 안에서 리얼리즘을 발견하려고 했다.”
시도 꾸준히 써서 시집으로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1983), 『마음속 붉은 꽃잎』(1990),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2006), 『저녁』(2010) 등을 펴냈다.
―시 세계는 어떠했는가.
“소설보다 오히려 시에 내적으로 추구한 자유나 눈물 같은 것이 더 강하게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시집 『저녁』에는 죽음의 세계로 많이 들어갔던 것 같다.”
그의 시집 『저녁』에는 죽음을 다룬 시가 적지 않았다. 늦은 밤, 장례식장에 홀로 남아 영정 속 웃음과 마주하며 위로받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자정이 지나면서 문상객들이 빠져나가고,/ 영안실에는 오롯이 너와 나만 남았다.// 깨지기 쉬운 엷은 유리막이라도 만지듯, 너의 눈길은/ 영정 안에 들어 있는 나의 웃음을 어루만진다.// 아아, 마지막으로 따뜻하구나.// 문상객들의 거친 눈길을 대하며, 해종일/ 언제 깨질 줄 몰라 조마조마하던 나의 웃음을// 이불이듯 덮어주는 너의 눈길은.”(「영정」 전문)
송기원은 1970, 80년대 네 차례나 투옥되며 민주화의 한 복판에 섰다, “어쩌다보니”.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서라벌예대에서 소설을 가르쳤던 소설가 이호철의 구속에 문인들과 함께 데모에 나섰다가 붙잡혀 첫 구속,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 연루, 1990년 『붉은 산 검은 피』를 펴낸 오봉옥 시인의 필화사건 연루.
특히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는 과정은 헛헛하기 그지없다.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뒤늦게 복학해 교생 실습 중이던 1980년 5월, 그는 나중에 농민운동가가 되는 백남기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전두환 화형식에 참여했다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져 드는데.
“처음에는 전두환 화형식을 학교 안에서 한다고 하더라. 흰 가운을 입은 의대 1학년생들을 중심으로 상여를 매고 학교 안에 뱅뱅 돌더니 갑자기 시내로 나가자고 하더라. 예이, 모르겠다, 하고 나가자고 했다. 상여를 앞세우고 노량진, 영등포를 거쳐 국회의사당을 빙 돌아 서대문에 오니까 경찰이 허공을 향해 총을 빵빵 쏘더라. 다시 상여를 이끌고 서울시청으로 간 뒤 서울역으로 가서 화형식을 끝마쳤다. 그런데 화형식 시위는 외신을 타고 난리가 났던 모양이더라. 5월17일 계엄령이 발동됐다.”
1개월 뒤 붙잡힌 그는 남산 안기부에서 가혹한 조사를 받았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두 번째 구속이 되고 만다.
“안기부에서 직살나게 얻어터졌는데, 처음에는 김대중에게서 돈을 받아 상여를 사서 화형식을 한 것으로 말하라고 하더라. 김대중을 알지도 못하고, 백남기가 주도했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김대중이 고은 시인에게 돈을 줬고, 다시 고은에게 돈이 온 것으로 하자고 했다. 고은은 짠돌이여서 돈을 받은 적이 없고 둘째 딸이 5000원을 받은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랬더니 고은에게서 1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둔갑시키더라. 그 돈으로 상여를 만들어 시위를 벌였다는 것이었다(웃음).”
더구나 그가 두 번째 징역을 살고 있을 때, 화성에 살고 있던 어머니는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속에서 목을 맸다.
그는 한동안 실천문학의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도종환의 시집 『접시꽃 당신』이나 윤재걸의 『화려한 휴가』, 김신의 『졸병시대』 등 잇따라 베스트셀러를 펴내며 실천문학의 성장에 큰 도움을 줬다. 네 번째 징역에서 풀려난 뒤 실천문학을 그만뒀다. 이 시기 모습에 대해, 그는 책에서 “위선의 탈을 뒤집어”쓴 것이라고 회고한다. “그럼에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성역에 빌붙어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고 말았다. 그 방법이 바로 위선이었다. 나는 괴물의 얼굴에 위선이라는 탈을 뒤집어썼다. 그리하여 운동권의 여러분들은 물론 세상을 향해, 추악한 괴물 대신에 위선으로 위장한 얼굴을 버젓이 내밀었다.”(14쪽)
그는 이후 소설도 쓰면서 중앙대 문창과 초빙교수로 강단에 섰다. 하지만 둘째 딸이 백혈병에 걸리자 교수직을 그만두고 1년간 병간호에 전념했고, 딸을 세상을 떠나자 그는 명상, 요가 등에 빠져들어 처사처럼 곳곳을 헤맸다.

―딸이 떠난 뒤 10년 가까이 부유했다고 했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부유한 것인가.
“미얀마의 명상센터에 가서 명상을 했고, 국내에 들어와선 계룡산이나 지리산 등을 전전했다. 해인사나 만기사 등 여러 절에서 절밥을 먹었고, 만기사 원경 스님으로부터 덕문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해인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산봉우리에 있는 소리원 고시원에 가기도 했다. 고시원에는 노스님이 많이 있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분위기가 난다. 노승들은 거기에서 나오지 않고, 옆에 요양원까지 있어 거기에서 삶을 마치는 경우가 많다. 토지문학관을 비롯해 여러 문학관에도 돌아다녔다. 이곳은 지난해 왔다. 거의 1년이 다 돼 간다.”
당시의 신문기사에는 그의 모습이 얼핏얼핏 담겨 있기도. “...요즘 계룡산 깊은 곳에서 용맹정진 중이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걸치고 고무신을 신은 그는 갑사 대지암에 딸린 토굴에 머물면서 불교 공부와 명상,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토굴은 겉에서 보면 돌무덤처럼 생겼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3평짜리 방안에 앉은뱅이책상 하나와 노트북 컴퓨터, 『능엄경』 등 몇 권의 책들이 있을 뿐이다.”(박해현의 1999년 6월29일자 기사)
―이곳의 일상은 어떤가.
“오전 6시쯤 일어나서 밤 10시쯤 잔다. 생활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없다. 글을 읽고 쓴 글을 고친다. 특별히 건강은 신경 쓰지 않는다. (술은 마시는지) 집에서 먹지 않고, 기분 나빠도 먹지 않으며, 기분 나쁜 놈들과도 먹지 않는다. 다만 좋은 벗을 만났을 때만 마신다. (요즘 낙은) 저녁에 자다가 일어나서 휴대폰 등으로 묘한 것을 본다. 우주 표준모형이나 우주 미스터리, 연대표 등 빅뱅으로부터 시작된 빅 히스토리를 보거나 공부한다. 재미있더라.”
―앞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고, 어떤 작품을 쓰고 싶은가.
“그런 것은 완전히 없어졌다. 앞으로 뭘 할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는 스리랑카로 가려고 했다. 스리랑카에는 집들이 띄엄띄엄 있어서 혼자 살기 좋다더라.”
그는 이때 불쑥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 싫다,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그의 대답이 무심하다. “(인생이) 재미가 없어요. 염세가 아니라 혐세라고 할까.”
인터뷰가 끝나고 해남 읍내로 나가 함께 이른 저녁을 먹었다. “저는 고양이들에게 손으로 획 던져 음식을 주는데,” 우연히 고양이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자, 동석한 상주 작가 이원화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혀를 껄껄 차며. “송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음식을 놓은 뒤 먼저 한 점을 먹어 고양이들을 안심시키더라. 얼마나 고양이에게 끔찍하게 하시는지….”
식사가 끝나자, 그는 고양이에게 준다며 생선 한 조각을 비닐봉지에 담고서 택시에 몸을 실었다. 만약 그가 내세에 고양이로 태어난다면, 고양이의 삶이 진짜이고 인간의 삶이란 한갓 꿈일까, 아니면 고양이로 태어난 것이 한갓 꿈일까. 절급하게 궁금해 그의 시를 찾아 읽는다, 상경하는 기차 속에서.
“참 오래 머물렀다./ 주인이듯 내가 머무는 동안에, 몸은/ 벼라별 모욕을 다 겪고, 몇 군데는/ 부러지고 꺾이고 곪아서, 끝내/ 만신창이가 되었을 거다.// 귓구멍에 감창이 들어차고/ 뱃구레 가득히 욕지기가 출렁거려/ 똥구멍이 미어지는 수모를 견디고야, 비로소/ 몸이 나를 버렸을 거다.// 이제 나는 몸이 없는 곳으로 떠난다.// 그렇게 몸이 없이 사방을 돌아보면, 아아,/ 몸 이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몸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없구나.”(「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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