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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에워싼 고대 도시의 흔적… 중세 성문을 열다 [박윤정의 칼리메라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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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7-04 10:00:00 수정 : 2021-07-03 23: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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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로도스섬

아테네로부터 400㎞ 떨어진 천연의 요새
섬 중앙 린도스 명물 ‘당나귀 택시’ 눈길
손 짚을만한 난간조차 없는 계단 오르면
지중해가 보이는 언덕 위엔 아테나 신전
섬 곳곳 유적들 마치 역사 필름 보는 듯

선상에서 맞이하는 해돋이와 해넘이를 바라보는 감동을 꿈꾸며 크루즈에 올랐다. 버킷 리스트 한자락을 이제야 실현할 수 있게 되나 보다. 첫날은 게으름을 비웃기라도 한 듯 민낯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은 놓칠세라 하루 시작을 채비하는 태양보다 먼저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뜬다.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선상 위로 오른다. 잠결에 오른 데크는 바다 위 오롯이 떠 있는 크루즈를 깨우는 듯 차가운 바람이 쓸어내린다. 어설픈 잠옷 차림에 서 있는 사람들이 어둠을 가르고 하나둘 보이더니 구름이 희미한 빛을 안고 기지개를 켤 무렵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든다. 해돋이를 기다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두들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하늘 아래 바다! 그 위에 크루즈선이 물결 따라 고요히 일렁인다. “아!” 조용한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기다리던 태양이 수줍게 수면 위로 빼꼼 얼굴을 내민다. 붉은 호가 서서히 원을 그린다. 주위를 감싸는 탄성을 들으며 초점 맞춘 눈을 한시도 떼지 못한다. 태양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시간은 멈춘 듯하다. 지중해에 떠오는 붉은 빛은 주위를 삼키며 정적을 이룬다. 삶의 지난날, 수만 번 태양이 이렇게 떠올랐을 터인데 오늘에서야 온전히 맞이한다.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 피부에 내려앉은 차가운 물방울에 정신을 차리고 선실로 돌아왔다.

크루즈 3일차 일정은 항해 없이 온종일 섬에 정박해 있다. 지난밤, 크루즈는 밤새 바다를 헤쳐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멀다고 할 수 있는 로도스섬에 도착했다. 아테네로부터는 400km 정도 떨어진 섬으로 18km 정도 넘어 터키를 마주한다. 유럽 여러 도시에서 항공편이 오가고 대형 크루즈선이 정박할 수 있는 큰 섬이다.

오전에는 해맞이 감동을 안은 채, 섬 중앙에 위치한 린도스에 다녀오기로 했다. 버스로 40여분 이동하면 바닷가 절벽 위에 아크로폴리스가 건설된 고대 그리스 유적을 만날 수 있단다. 왕복 4시간 정도 일정이라 하니 아침의 수줍던 태양이 이글거리기 전 돌아올 수 있겠지. 일정을 선택한 사람들과 더불어 버스에 오른다. 왼쪽 뒷자리 창밖 풍경은 섬 중앙에 세워진 고대 도시의 흔적을 따라 변한다. 과거 역사 필름을 보듯 파노라마가 펼쳐지더니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린도스의 명물인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당나귀 택시’ 모습

언덕 아래, 마을 입구에서 아크로폴리스까지는 걸어갈 수도 있고 당나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주차장 주변에는 린도스 명물 당나귀 택시가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승객을 태워 유적 입구까지 다소 험한 오르막길을 오르기에 다소 모험심이 필요해 보인다. 이른 시간이라 덥지는 않지만 신기한 경험을 하고 싶어서인지 비교적 많은 관광객이 당나귀에 오른다. 그들의 생업에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왠지 당나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걷기로 했다. 당나귀 발걸음에 흔들리는 것보다 좁은 골목과 계단을 오르며 마을의 정취를 느끼는 것이 나을 듯하기도 하다.

바닷가 절벽 위에 건설된 고대 그리스 유적 아크로폴리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린도스는 로도스섬 동쪽의 해안에 있는 고고 유적지로 로도스시에서 남쪽으로 약 55km 거리이다. 마을보다 높은 곳, 아크로폴리스를 방문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찾는다. 아름다운 해변이 휴양객들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천연의 요새는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성 요한 기사단, 오스만 제국이 머문 역사이야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고고학적 해석을 풀어 놓기도 한다. 유적 입구에는 후대에 세워진 거대한 성벽이 있다. 손을 짚을 만한 난간조차 없는 높은 계단을 따라 올라 동굴 입구 같은 석문을 통과하면 정상에 다다른다.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아테나 신전이 세워져 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정상의 파르테논 신전이 불현듯 떠오른다. 도심 불빛 속에 빛나는 신전이 다른 모습으로 지중해를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대인들이 사랑한 신은 도심에서도 바다의 섬에서도 한결같이 자리하고 있나 보다.

로도스는 섬이름이기도 하고 도시이름이기도 하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아내이며 아프로티테의 딸인 로도스의 이름을 딴 이곳은 태양의 축복을 받은 듯 찬란한 문명과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어깨에 걸터앉은 태양을 피해 크루즈로 돌아왔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항구도시 로도스는 또 다른 느낌이다. 섬이름이기도 하고 도시이름이기도 한 로도스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13세기 십자군전쟁이 끝나고 성요한기사단이 머물면서 세운 성이다. 몰타로 옮겨 또 다른 중세도시를 만들기 전, 로도스 기사단으로 불리며 이슬람제국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십자군 전쟁이 유럽 남쪽 로도스와 몰타까지 이어지는 중세 역사 한 끝자락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뒤척이며 숨을 고른다. 잠시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다 지친 해를 살펴보고 다시 섬으로 나갈 채비를 서두른다. 해변에서 수영과 낚시를 즐기는 관광객들을 지나 중세 성문 안으로 들어선다. 태양 열기에 데워진 성벽의 온기를 느끼며 중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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