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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이책만은꼭] 옳은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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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6-07 23:49:14 수정 : 2021-06-07 23: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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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 저마다 옳다고 믿는 것 내세워 다퉈
무너진 도덕 기초 세우려면 공동선 추구해야

오늘날 현대사회는 무엇이 좋은 삶인지 알지 못하는 도덕적 혼란에 빠져 있다. 우리는 때로는 나의 좋음과 너의 좋음이 화해를 모르고 충돌하는 사태에 직면하고, 때로는 좋다고 믿는 것을 택함으로써 손해를 보거나 위해를 입으며, 때로는 산모와 태아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는 상황처럼 어쩔 수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학습한 것이 배반당하는 일도 흔하다. 심지어 드러난 범죄조차 부나 권력 유무에 따라 도덕 판단과 법적 처벌이 달라지고, 입법자들이 규칙과 제도를 특권층에 유리하게 설계함으로써 아예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기도 한다. 좋음의 바탕이 흔들리면, 일찍이 중국의 전국시대에 나타났던 것처럼, 완력이 명분을 이기는 ‘쟁탈의 시대’가 열린다.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이 삶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현대의 아리스토텔레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문예출판사 펴냄)에서 도덕을 잃어버린 시대에 우리가 함께 추구할 공동선과 가치를 질문한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도덕적 무능은 ‘옳음’을 추구하는 정의주의와 상대주의를 원인으로 한다. 정의주의는 도덕 판단이 개인의 감정적 선호 문제라고 믿는 것이다. 여기에 사로잡히면, 도덕은 일종의 거래가 된다. 도덕은 나의 선호와 타인의 선호를 적절히 타협해 제휴하는 일시적 동맹 상태로 전락하고, 결국 공동선과 관계없는 ‘나의 이익’을 뜻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최대’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공리주의의 효율성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도덕적 토대를 인간 너머의 보편적 질서에서 찾으려 했던 계몽의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흄의 정념이든, 칸트의 이성이든, 키르케고르의 선택이든, 어떤 이성적 기획도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정당성을 구축할 수 없었다. 심지어 합리적·자율적 도덕 주체란 허구라는 사실을 갈파했던 니체조차 극단적 개인주의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결과, 우리는 저마다 옳다고 믿는 원리를 내세워 무한히 다투는 상대주의에 유혹당했다. 다양성 존중을 빌미로 속히 해결해야 하는 사회 문제에서조차 좀처럼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는 혼란에 빠져들고, 힘자랑을 통해 각자가 자기 정당성을 강요하는 상시적 시민전쟁 상태에 돌입한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에 맞서서 매킨타이어는 현대사회의 무너진 도덕적 기초를 세우려면 ‘옳음’보다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 욕구만 우선하는 원자적 존재도, 영구불변의 법칙을 구현하려고 사는 도구적 존재도 아니다. 그보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 타자와 함께 살면서 주어진 삶을 통일된 전체로 구성하려고, 즉 의미 있게 살려고 노력하는 서사적 존재다.

우리 삶에 누구나 따라야 할 보편 법칙이 없다고, 아무 규칙도 없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쌓아온 지혜로부터 우리는 사적인 이익보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낫고, 상황에 맞춰 신중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며 약자를 연민하고 타자를 배려하는 일이 더 덕 있는 행위임을 알고 있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세부는 다를 수 있어도 이것은 언제나 좋은 삶의 기초다. 모두가 이를 규칙 삼아 인생 이야기를 써나갈 때, 우리는 개인의 삶이 더 의미 있게 되면서 사회 전체가 도덕적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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