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관념적 산수서 벗어나 순간 순간의 실경을 그리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1-06-06 08:00:00 수정 : 2021-06-04 18:57:51

인쇄 메일 url 공유 - +

(59) 청전 이상범이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

2021년 삼성 등 대형 미술품들 기증으로
행방 묘연했던 작품들 세상에 나와
현대 동양화 개척 이상범 작품 대표적
중국 전통화풍서 탈피 리얼리즘 모색

농도를 달리한 점 같은 짧은 선 통해
수묵의 미묘한 변화 이끄는 묵법 창출
원근·입체감 비롯 전체 통일감 보여줘
자연스러운 풍경과 함께 몽환적 분위기
1920년대 당대를 대표하는 서화가 14명이 각각 글과 그림을 나누어 그린 합작도이다. 당시 신구 서화가들 사이 교류를 볼 수 있다. 이상범 외, 합작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림만큼 아름다운 유산

올해는 한국 미술계에 길이 남을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전에 없던 대형 미술품 기증이 벌써 두 차례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미술관들은 한국 미술사 연구 밑동과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을 갖추게 되었다.

그 첫 번째 기증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컬렉션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한 일이다. 평생에 걸쳐 이룬 문화재, 미술품 소장은 5만여점에 달한다. 최고 수준의 고가 작품들이라 미술관의 연간 소장품 구매 예산으로는 소장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지난달, 얼마 전 타계한 수묵 추상화의 거장인 서세옥의 유족도 그가 남긴 유작과 수집품을 기증했다. 본인의 작품을 비롯하여 살아생전 모은 미술품의 숫자는 3290점에 달한다. 지난 연재 45화에서 소개한 서세옥 작가를 비롯한 유족들의 결단이 존경스럽다.

런던 테이트, 파리 퐁피두센터 등 해외 국립미술관을 방문하면 항상 그들의 소장품이 부러웠다. 미술사에 있어 주요한 작품을 모아낸 소장품 상설전시의 힘이 강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랬다. 그 장면은 그것을 가능케 한 그 나라를 대단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소장품 중 주요 작품 다수는 알고 보면 기증받은 작품들이다. 테이트의 경우 애초에 제당 사업가 헨리 테이트가 기증한 근현대미술품으로 1897년 세워졌다.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기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광주시립미술관의 하정웅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의 가나아트 컬렉션 등이 있다. 하지만 이번 기증들은 사회적 관심을 모은 만큼 기증 문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삼성의 사회환원 발표가 있던 날 미술 뉴스가 속보로 전해진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고희동의 생일날 이상범, 이도영, 이한복, 이용우, 변관식 등이 모여 그린 작품이다. 왼쪽 ‘청전자상(靑田自像)’이라는 글자 아래가 이상범의 모습이다. 이상범 외, 인물희화.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현대 동양화단의 스승, 청전 이상범

이번 대형 기증들은 행방이 묘연했던 작품들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의 청록산수화 ‘무릉도원도’(1922)도 있다. 후원자 이상필의 요청으로 제작한 이 그림은 실물을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좋은 재료를 사용해 작가 역량을 발휘한 작품이라는 이야기만 있었다. 이 작품은 이건희 컬렉션이 포함하고 있었고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과감하고 아름다운 색채와 구성이 눈길을 끈다며 의미를 밝혔다. 무릉도원을 전면에 펼친 작품이다. 초록 채색이 무릉도원을 빛낸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그린 이상범은 근현대기의 화가다. 소정 변관식 등과 함께 20세기 초 한국미술을 빛낸 인물이다. 그는 1897년, 조선 왕조 말엽에 공주에서 공주부 영장 이승원과 강릉 김씨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부친이 50세로 타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10세 무렵 서울로 이주하여 돈화문 근처에 살았다. 12세 무렵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14세에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YMCA학관 중학부에 들어갔지만, 곧 그만두고 서화미술회에 들어갔다. 서화미술회는 1911년 서울에 생긴 최초의 근대식 미술학원이었다.

이상범은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강습소에서 본격적으로 회화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도화서의 마지막 화원인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전통적인 화풍을 계승하여 사의적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이 스승 중 안중식은 이상범과 노수현을 제자로 매우 아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기의 호인 심전(心田)을 나누어 노수현에게 심산(心山) 이상범에게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내리기도 했다. 1918년 서화미술회가 문 닫은 뒤에는 본인 서재인 경묵당에 두 제자를 들여 지도를 이어갔다.

이상범은 이러한 과정에 서화적 기량을 두루 겸비한 화가로 성장하였다. 1920년에는 창덕궁 내전의 벽화를 제작할 때 동원되기도 했다. 24세의 나이에 경훈각 내벽의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1920)를 그렸다. 이 작품에서는 구성과 소재, 준법과 수지법, 채색의 표현에서 안중식의 영향이 보인다. 이 무렵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이 일본에서 귀국했다. 그리고 안중식과 함께 첫 번째 근대 미술가단체인 서화협회를 조직했다. 이상범은 이 서화협회에 회원으로 가입, 신구 서화계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들어 한국 전통화단에는 예리한 비판이 가해졌다. 시인 변영로가 예술의 시대정신 발현을 강조하며 창조정신을 촉구했다. 1922년 이상범도 과거의 배움을 답습하는 작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의 영향이 있는 전통화법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우리 미술을 개척해 내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의지는 1923년 변관식, 노수현 등과 동연사(同硏社)를 결성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은 동양화에서 서양화의 사생 태도와 리얼리즘을 모색했다. 이 기간 중 이상범은 조선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에 지속하여 출품, 여러 차례 수상했다. 동아일보 미술기자로 삽화를 남기는 등 근대 화단을 대표하는 활동을 펼쳤다.

‘춘경산수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청전 양식’이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

여기 산봉우리들이 높이 솟았고 그 뒤로 이어진다. 봉우리는 앞에서 선명하고 뒤로 갈수록 그림자처럼 흐려진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안개는 새벽의 기분을 전해온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 봉우리들도 그러한 시간을 맞았다. 기암 위를 수놓은 것은 초록초록한 봄의 잎이다. 두꺼운 가지를 넓게 뻗어낸 나무는 분홍꽃을 피운다. 화려한 분홍빛으로 칠해진 꽃은 계절의 화려함을 전한다. 그 밑으로 맑고 푸른 폭포수가 시원하게 흐른다.

‘춘경산수도(春景山水圖)’는 이상범이 복사꽃이 만발한 산천을 그린 그림이다. 그 모습을 단일한 시점으로 포착해 화면에 전개하고 있다. 덕분에 풍경을 자연스럽게 흐르듯 감상할 수 있는 화면구조를 가졌다.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가로지르는 안개는 몽환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작품 속에는 선만큼이나 많은 수의 점들이 등장한다. 이 작은 점들은 농도를 달리해 지면의 굴곡을 만들어낸다. 더불어 원근감과 입체감을 비롯해 전체적인 통일감을 부여한다.

이처럼 이상범은 한순간의 실경을 그려낸 듯한 산수를 그렸다. 이는 기존 관념적 산수에서 풍경화적 산수로의 전환을 보여주기에 중요하다. 이러한 새로운 근대적 실경산수화풍은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 당시 미술 전시와 행사에서 ‘청전풍’ 수묵산수화가 눈에 띄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해방 이후 이러한 전환을 발전, 물동이를 인 촌부 등 한국적 정취를 보여주는 장물을 다루기 시작했다. 농담을 달리한 점 같은 짧은 선으로 수묵의 미묘한 변화를 드러내는 자기만의 필치와 묵법을 창출했다. ‘청전 양식’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양식은 이렇게 구축됐다.

그는 말년에 50년대부터 등장하는 횡폭의 화면을 전형화시켰다. 수묵의 농담변화와 반복적 짧은 필치로 평원적 자연을 그렸다. ‘유경’은 이렇게 가로로 긴 화면으로 안정감 있는 구도를 갖춘 작품이다. 상대적으로 일찍 그려진 ‘춘경산수도’가 세로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작품은 야트막한 한국의 산수를 소박한 묘사를 통해 서정적으로 나타낸다. 작품 전반을 감싸는 고요한 분위기의 생성에서 작가의 원숙미가 느껴진다. 그는 유경을 그리고 채 10여년이 지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삶의 행보 중 여전히 논란인 부분도 있지만 이러한 작품들이 한국의 현대 동양화에 미친 큰 영향은 분명하다.

김한들 큐레이터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박보영 '상큼 발랄'
  • 박보영 '상큼 발랄'
  • 고윤정 '매력적인 미모'
  • 베이비돈크라이 이현 '인형 미모'
  • 올데이 프로젝트 애니 '눈부신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