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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개천용’ 명문대생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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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5-31 23:44:28 수정 : 2021-05-31 23: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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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기준으로나 개천용이지 요즘 사회에서는 ‘그냥 흙수저’일 뿐이에요. 개천에서 용이 됐어도 그냥 계속 개천에 사는 거죠.”

최근 ‘계층 사다리’ 관련 취재를 하던 중 만난 자칭 ‘흙수저’ 명문대생 A씨는 인터뷰 내내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의외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열심히 공부해 서울의 내로라하는 대학에 들어간 그에게 미래가 없다니. 우리 사회에서 ‘좋은 대학’ 입학은 계층 상승을 위한 기본 사다리였지 않은가.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A씨가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생 타이틀을 거머쥔 이상 전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박지원 사회부 기자

그러나 A씨는 “막상 대학에 와보니 오히려 확인사살을 당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자신과 달리 금수저 집안 출신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재력과 인맥을 그대로 물려받은 이들과 경쟁해봐야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박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취업준비 기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경제적으로 못 버틸 나와 전문직 시험을 오래 준비해도 부모님이 다 지원해줄 수 있는 집안 친구들의 선택지는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어 “좁은 선택지 안에서 쫓기듯 취업한 후엔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고 뒤늦게 시작해 악착같이 모아봤자 서울에 집 한 채 사기 힘들지 않냐”며 “부모 덕에 서울에 집을 가진 친구들을 평생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예전이었다면 ‘개천에서 난 용’으로 분류됐을 가난한 집의 우수생마저 계층이동 가능성에 회의감을 느끼는 상황은 교육 자체가 더 이상 계층이동 사다리 역할을 못 하게 된 현실을 방증한다. 소위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 중 부유층 자녀 비율은 빠르게 늘고 있다. SKY 신입생 중 부모 소득이 9∼10분위인 고소득 가정 출신은 2017년 41.4%에서 지난해 55.1%까지 늘었다. 특히 서울대는 고소득 가정 출신 신입생 비율이 2017년 43.4%에서 지난해 62.9%로 급증했다. 대학이 계층이동 사다리가 아니라 계층 대물림 수단이 된 셈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불공정에 분노하면서도 막상 수저 색깔에 따라 주어진 삶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며 사는 걸 당연시하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문화 분야에서조차 개천용 신화는 예전만큼 환영받지 못하는 반면 금수저는 자연스럽게 동경의 대상이 된다. 교육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도 스포트라이트는 금수저 집안 자녀들에게 쏟아진다. 부잣집 자녀들이 입시 경쟁을 하는 틈에 끼어든 가난한 집안 출신 아이는 귀찮고 얄미운 훼방꾼처럼 묘사되기 일쑤다. 스카이캐슬이 그랬고 펜트하우스가 그랬다. 일각에선 흙수저 집안 출신 캐릭터들을 ‘감히’ 자신의 몫이 아닌 것을 욕심내는 발칙하고 분수 모르는 아이로 비꼬기도 한다.

계층이동 가능성이 없는 사회는 곧 희망이 없는 사회다. 이런 사회를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개개인이 노력해야 할 동력이 주어질 때 사회는 비로소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최소한 교육의 계층이동 사다리 기능이 복원돼야 한다. 누구나 물고 태어난 수저의 색깔과 무관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공부하면 더 나은 삶을 성취할 수 있어야 사회 역시 더 역동적이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박지원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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