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부양제도’ 전면 보완 목소리
英·獨 등 재산·연금 분할 참고할 만
양육비 떼먹는 행위도 처벌 강화를
남겨진 가족 경제·정신적 고통 클 땐
이혼 불허하는 가혹조항 도입 필요
위자료·중혼 처벌 규정도 정비해야 끝>

헌법재판소가 2015년 간통죄를 폐지하는 결정을 내린 뒤 가족 관계가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법원은 이혼 소송에서 가정 파탄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도 받아들이는 ‘파탄주의’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실적으로 혼인생활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 됐을 경우 가정 파탄의 책임 유무를 묻지 말고 이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흐름이다. 이런 세태로 가정 해체 현상은 심화하고 혼인 파탄의 책임이 없는 배우자와 자녀는 법적 사각 지대에 놓이게 된다. 취재팀은 ‘범현대가의 축출이혼’ 사례를 취재하면서 민법의 가족 관계 조항이 정작 가족을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봤다. 가정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가 상대 배우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정몽익 KCC 글라스 회장 이혼 사건을 통해 현행 가족법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한다.
‘바람난 배우자의 이혼 요구는 끝까지 들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실적 문제들이 닥친다. 피해를 줄이자니 이혼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무책 배우자가 유책 배우자의 일방적인 이혼 요구를 마주한 뒤 밟게 되는 ‘악순환의 굴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할 사회적 안전판, 즉 가족법에 이 부분이 ‘입법의 공백’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수용하지 않는 ‘유책주의’ 관점에서는 이혼 거부라는 맞대응이 가능하지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재산권 확보 등에서 불리한 형국이 펼쳐진다. 제도적 보호장치 없이 법원의 판결도 파탄주의(사실상 혼인이 파탄났다고 인정되면 이혼을 허락하는 관점)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무책배우자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전문가들은 혼인 파탄의 책임이 없는 배우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가족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양·양육 문제 해결이 우선”
24일 법조계, 학계 등에 따르면 파탄주의를 도입한 다른 나라들도 이혼한 본처의 경제적 문제와 자녀 교육·양육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영국의 경우 ‘부양료지급명령’과 ‘재산조정명령’ 제도를 통해 이혼 후에도 생활수준과 자녀의 이익에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규정했다. 독일은 ‘잉여공동재산제’를 채택해 재산분할 후에도 직장이나 자산이 없는 배우자에 대한 상대 배우자의 부양 의무를 마련했고, 이혼 후 연금에 대해서도 분할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프랑스는 자녀의 복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가장 어린 자녀가 일정한 나이에 이를 때까지 무책 배우자에게 혼인주택을 임대하도록 하고 있다.

국내는 최근에서야 ‘이혼 후 부양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부양비 청구권 등을 인정해 재산분할 및 위자료와 별도로 유책 배우자로 하여금 이혼 후에도 일정 기간 생계비를 주도록 강제하자는 제도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이동진 교수는 “서구 사회의 모델은 결혼으로 인해 일을 안 하게 되면 이혼 후 다시 취업하기가 어려우니 재취업까지는 버틸 수 있도록 부양비를 주는 개념”이라며 “우리는 아직 논의가 미흡한 초기 단계이고 방식과 기간, 부양비 지급 이행을 어떻게 강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녀양육비 지급 제도도 손봐야 한다. 법정에서 무책 배우자가 자녀양육비 청구소송에서 승소한들 판결문은 ‘종잇조각’에 불과한 실정이다. 구본창 배드파더스 대표는 “이혼 후 상대방 배우자가 양육비를 주지 않는 사례가 10건 중 8건꼴”이라며 “아직은 양육비를 주지 않더라도 30일 이내에서 구치소에 감치하는 게 고작이고 실제로 감치되는 경우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구 대표는 “이 때문에 유책 배우자가 이혼을 하기 위해 일부러 양육비를 안 주고 괴롭히는 경우도 생긴다”면서 “이는 결국 법적, 제도적인 미비점이 원인인데 시급하게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양육비이행법이 개정돼 올해 중순부터는 양육비 지급을 거절하는 악성 채무자에 대해 출국금지·명단공개·형사처벌(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운전면허 정지 등 조치를 할 수 있도록 기반이 마련됐다. 하지만 유책 배우자가 고의로 주소지를 다른 곳에 옮겨놓고 소장을 받지 않으면 감치 판결도 어려운 실정이다.

◆유책에는 합당한 징벌 필요
약자를 중심으로 한 가족보호 대책과 함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유책 행위를 억제할 제도적 장치 마련이다.
일찌감치 혼인에 파탄주의 관점을 도입한 서구 국가들도 관련 법에 ‘가혹조항’을 두는 등 축출이혼의 시도를 막고 있다. 가혹조항은 배우자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줘 가혹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판단될 경우, 법원은 이 조항에 따라 이혼을 불허할 수 있다. 파탄주의를 허용한다고 해서 유책 배우자에 대한 법적, 정서적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이다.
유명무실한 위자료 제도에 대한 지적도 높다. 위자료가 유책 배우자에게 징벌이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도움도 안 된다는 취지다. 우리 민법 제806조는 무책 배우자가 입은 정신적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법원에서 결정되는 위자료는 3000만∼5000만원 수준이다. 자산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정액 개념의 붕어빵 판결이다. 이혼청구 소송에서 유책 여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미국의 경우 유책 배우자의 경제력에 따라 위자료를 책정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막대한 위자료를 감수해야 한다. 무분별한 축출이혼을 예방하는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법이 금지한 중혼(重婚)이 제약 없이 이뤄지는 점도 문제다. 일찍부터 파탄주의를 채택한 나라조차도 중혼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가 1975년 간통죄를 폐지하면서 중혼죄에 대해 구금 1년 및 벌금 4만5000유로 등 처벌조항을 마련한 바 있다. 물론 우리 민법도 ‘배우자가 있는 자는 다시 혼인하지 못한다’(제810조)는 조항이 있다. 가족관계등록 공무원이 혼인신고를 수리할 때 기존 혼인신고가 남아있는 경우 중복 신고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행정처리의 불편함을 제외하면 중혼에 따른 부담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이혼시장’이란 관점에서 보면, 남겨진 아내와 자녀들은 경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대변할 법률적 목소리가 크지 않다”며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파탄주의 도입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편”이라고 전했다.
특별기획취재팀=조현일·박현준·김청윤 기자 con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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