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뱅크 손정의가 언급한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 등 조명
혁명가로서 산 필사의 도약과 비극적 최후 등
‘4인의 사무라이’ 통해 일본의 역사 재해석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박훈/21세기북스/1만6000원
미국인은 국가나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물을 때 주로 독립전쟁 주역들을 소환한다.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프랑스 대혁명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위기나 결단의 순간 어떤 이들을 가장 많이 불러낼까. 바로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다.
재미있는 건 역사라는 게 ‘과거와 현재의 대화’(E H 카)여서 현재 소환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부각되는 메이지유신의 주역 역시 달라진다는 점이다. 만약 아시아와의 협력 노선보다 일본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소환한다. 아베 신조 전 총리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아시아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국제주의적 시각을 갖춘 이들은 주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소환한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그렇다.
물론 변화와 함께 일본의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를, 철저히 현실적인 개혁을 희망하는 정치인이라면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각각 강조할 것이다.
저자인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1868년 메이지유신의 토대를 닦은 이들 4명의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근대 일본의 탄생을 쉽게 풀어냈다. 압축적이면서도 쉽고, 그러면서도 각자에 대한 평가는 촌철살인이다. ‘옆길’에서 보여주는 배경적 지식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울대에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서가명강’ 시리즈의 열네 번째 책이다.

저자는 먼저 요시다 쇼인에 대해, 인재를 길러내고 매료시켰다며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평가한다. 페리함대를 보고 세계를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도항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그는 고향에 일종의 사숙인 ‘송하촌숙(松下村塾)’을 열어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젊은 사무라이의 리더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 등이 그들이다.
요시다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선 강한 군대, 특히 해군이 필요하고 강군 육성을 위해 경제력과 무역이 필요하다며 부국강병론을 역설했다. 전국의 지사들이 일종의 국가인 ‘번(藩)’을 뛰어넘어 연대해 개혁을 도모하는 ‘초망굴기론(草莽屈起論)’을 제창했지만, 막부의 간부를 죽이려다가 적발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조선 침략과 울릉도 지배를 주장하는 등 제국주의적 해외 팽창 시각을 주창해 극우 인사들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다.
사카모토 료마는 무력이 아닌 비범한 외교와 협상으로 메이지유신의 ‘주체세력 연합’을 이끈 근대 일본의 아이콘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료마는 외세를 배격하는 ‘양이’는 가능하지 않고, 부국강병이 우선이라며 해군 건설과 무역에 열심이었다. 그는 막부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신식 무기를 보유한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이 연합해야 한다며 앙숙이었던 두 번의 연합, 이른바 ‘삿초동맹(薩長同盟)’을 극적으로 성사시킨다. “제가 두 번을 위해 뛰어다니며 전력해온 것은 삿초뿐 아니라 일본 국가를 위해서입니다. 일본의 장래를 생각하면 밤에도 잠이 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어째서 응어리를 버리고 일본의 장래를 위해 깊이 논의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의 노력으로 탄생한 삿초연합군은 결국 막부군에 연승을 거두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일왕의 친정, 의회 설치, 헌법 제정 등 신국가 구상인 ‘선중팔책(船中八策)’을 만들지만, 메이지정부 탄생 20일 전에 막부순찰대에 피살된다.
저자는 “삿초동맹과 대정봉환(大政奉還·막부 권력을 일왕에게 반환)은 료마의 스타일이 만들어낸 걸작”이라며 “메이지유신이 그의 명랑함을 닮았더라면 근대 일본은 더 세련됐을 것”이라고 평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주인공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경우 급격한 개혁에 상실감이 컸던 사무라이를 대변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유배와 복귀를 반복한 그는 정치적 위기를 이겨내고 메이지정부 수립의 일등공신이 된다. 특히 원정군 대장으로서 막부의 근거지 에도를 평화롭게 접수했다.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다가 실각한 뒤 메이지정부의 정책에 반발해 1877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살한다.
저자는 “사이고는 서양과 근대를 배척하진 않았지만 동시에 일본과 전통을 함께 껴안으려다 상징이 됐다. 그 상징을 통해 근대 일본인들은 허기를 채우고 있다”고 꼬집었다. 도쿄 우에노공원에 그의 동상이 있다.
마지막 오쿠보 도시미치는 현실주의적 접근과 냉철한 판단으로 근대 일본의 개혁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무라이들의 봉기보다는 거대한 사쓰마번 권력을 이용해야 한다며 권력자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가 좋아하는 바둑을 배워 접근하는 등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메이지정부를 이끌고 번을 폐지하고 일왕이 직접 통치하는 ‘폐번치현(廃藩置県)’을 성공시켰고, 아직은 더 힘을 길러야 한다며 사이고의 정한론을 분쇄한 그였다.
오쿠보는 “무릇 나라의 강약은 인민의 빈부에 달려 있고, 인민의 빈부는 물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돼 있다”며 대외 침략에 앞서 부국강병으로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절친했던 사이고가 반란을 일으키자 정부군을 동원해 진압했지만, 그 자신도 얼마 후 출근길에 사무라이에게 피살된다.
저자는 “오쿠보는 억울하다. 천신만고 끝에 근대 일본의 초석을 놓은 그였지만, 살아 생전에는 ‘사무라이의 배신자’로, 죽어서는 ‘냉혈한 독재자’로 비난받았기 때문”이라고 변호한다. ‘일본의 철혈재상’으로 평가받는 오쿠보의 좌우명은 ‘위정청명 견인불발(爲政淸明堅忍不拔)’. ‘맑고 깨끗한 정치를 지향하고, 굳게 참고 견디어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저자는 결국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무시해도 우리만큼은 일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존경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이젠 일본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일 간에는 이제야 비로소 ‘베스트팔렌 체제’가 시작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의 경쟁이다. 양국 시민들은 역사를 숨김없이 직시해야 한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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