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형전투기(KF-X) 공동개발국인 인도네시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수천억원에 달하는 KF-X 분담금을 연체한 인도네시아는 대우조선해양에 추가 주문한 잠수함 3척 계약금도 지급하지 않고 있다.
인도네시아 내에서는 “KF-X에 쓰인 기술은 구식이다” “사양이 더 높은 잠수함을 원한다”며 부정적인 발언이 잇따라 나오는 실정이다.
인도네시아의 태도가 바뀔 조짐을 보이면서 동남아시아 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프랑스는 ‘빈틈 파고들기’에 나섰다.
프랑스의 ‘판 흔들기’ 전략이 효과를 거두게 되면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 방산시장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위험이 있다.

◆비용 지급 회피하며 프랑스에 눈 돌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강대식 의원이 방위사업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달 기준 인도네시아 KF-X 분담금 미납액은 6044억 원. 2016~2020년 지급해야 할 8316억 원 가운데 77%가 미송금됐다.
2016년에는 분담금 500억 원을 전액 납부했으나 2017년에는 1841억 원 중 452억 원만 냈다. 심지어 2018년에는 1987억 원 전액을 미납했다. 지난해에는 1907억원 중 1320억 원을 지급했으나, 올해에는 2018억 원을 전액 연체했다.
내년부터 9022억 원을 추가로 지급해야 하는데, 전체 분담금 1조7000억 원 중 미납액이 얼마나 늘어날지 알 수 없다. 시제기 1대와 기술 자료를 이전받고 48대를 현지 생산한다는 기존 계획 이행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4월 계약한 잠수함 3척 건조 계약금 1600억원도 2년 가까이 미지급된 상태다.
양국간에 정상회담과 국방장관 회담, 방산협력위원회가 계속 열렸고, 지난 9월에는 강은호 전 방위사업청 차장(현 방위사업청장)이 이끄는 대표단이 자카르타를 방문했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는 경제적 문제를 이유로 들고 있다. 경제성장을 위한 인프라 투자가 우선이고, 코로나19가 겹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KF-X나 국산 잠수함보다 고가인 유럽 무기에 관심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대선 맞수이자 장군 출신인 프라보워 수비안토가 지난해 10월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직후부터 문제가 불거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갈등이 원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KF-X 분담금 미납이 2017년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히 ‘대통령과 국방장관 간의 갈등’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그보다는 수년 동안 인도네시아 내부에서 누적된 부정적 기류가 KF-X와 잠수함 거래에 악영향을 미친 결과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인도네시아 리스크’ 관리가 소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동남아 방산시장 공략을 위해 조용히 움직이던 프랑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밑지고 팔더라도 인도네시아에 교두보를 확보, 한국 등 경쟁국들을 밀어내려는 태세다.
프랑스측은 플로랑스 파를리 국방부 장관이 현지 TV에 출연, “서명은 하지 않았으나 많은 작업을 수행했고, 거래도 잘 진행됐다”고 밝히는 등 합의 성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내년 초 체결될 것으로 알려진 양국간 포괄적 방산협력협정에는 프랑스가 라팔 전투기 36대 외에 스콜펜급 잠수함 3척, 고윈드급 초계함 1~2척, 스칼프 장거리 공대지미사일을 포함한 첨단 항공무장 판매가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닷소, 탈레스, 에어버스 등이 기술이전과 산업협력을 제공하고, 금융지원이 이뤄질 가능성도 높다.
특히 산업협력은 에어버스 여객기 생산에 인도네시아가 부품을 제공하는 형태가 거론된다. 닷소도 비즈니스 제트기를 만들지만, 미국 수출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우려를 피하기 위해 에어버스가 대신 나서는 것으로 해석된다.
방사청은 “인도네시아의 공식입장이 없다”는 점을 들어 라팔 거래와 KF-X는 별개라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군 소식통은 “방사청은 ‘인도네시아 라팔 구매=KF-X 이탈’ 프레임을 극도로 꺼리는 기류”라고 전했다.
하지만 방사청은 지금까지도 KF-X 분담금과 잠수함 계약금 미지급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지난 9월 자카르타에서 열린 실무협의 결과도 방사청이 철저히 함구하는 상황에서 프랑스와 인도네시아의 방산 거래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논란은 더욱 증폭되는 모양새다.

◆아직 기회는 있다…“패키지 딜 제안 필요”
인도네시아 내부 여론이 프랑스와의 방산 거래에 완전히 쏠린 상황은 아니다.
현지 사정에 밝은 방산업계 소식통은 “인도네시아에서도 KF-X 공동개발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이나 조직이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이들이 많이 위축된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는 영해와 영공 수호, 내부 안정에 많은 신경을 쓰는 나라다. 이를 위해 우수한 무기를 확보하려 한다. 러시아, 미국, 독일, 네덜란드 등 주요 무기수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다.
방위산업 후발주자로 인도네시아에 뒤늦게 진출한 한국은 선진국과 차별화되는 솔루션이나 신뢰를 제공하지 못하면 선진국들에게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다.
신뢰도도 마찬가지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무기도입사업에서는 ‘믿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 글로벌 기업이 참여하고, 선진국 정부가 보증하며, 신뢰할만한 국가가 도입해 성능이 검증된 무기가 많이 팔린다.

드라마나 뮤지컬 제작과정에서 ‘흥행 파워’를 지닌 배우나 제작자에게 섭외 제안이 몰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KF-X는 1980~1990년대 프랑스 닷소가 개발한 라팔보다 늦게 등장했다. 하지만 장거리 공대지 능력이 없는 등 전반적인 항공무장은 라팔보다 뒤떨어진다. 나발 그룹이 만든 스콜펜급 잠수함은 독일 209급보다 더 우수하다는 평가다.
국방기술품질원이 발간한 ‘2020 세계 방산시장 연감’에 따르면, 세계 100대 방산업체 중 프랑스는 탈레스(10위), 나발 그룹(21위), 사프랑(31위), 닷소(34위) 등 다수의 기업이 포진해있다.
이들은 라팔과 스콜펜급 잠수함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무기거래 과정에서 정부 간 협정을 선호하는 인도네시아 기류에 맞춰 방산협력협정 체결도 추진중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46위), 한국항공우주산업(60위), LIG넥스원(67위)만 세계 100대 방산업체에 포함됐다. 인도네시아와 잠수함 계약을 한 대우조선해양은 100위 밖으로 밀려났다. 전반적으로 프랑스에 열세인 셈이다.
이를 만회하려면 정부 차원의 ‘KF-X, 잠수함+@ 패키지 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프랑스처럼 인도네시아의 수요에 부응할만한 장비들을 한데 묶어 일괄적인 거래를 제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섬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는 말라카 해협 등에서 해적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 위협도 만만치 않다.
테러를 저지하려면 우리 군의 워리어 플랫폼과 유사한 개인전투장비, IT 장비, 장갑차 등이 필수다. 해적과 밀수 조직 소탕을 위해서는 고속단정을 확보해야 한다.
개인전투장비나 지휘통신체계, 고속단정 등은 국내 업체들도 생산하고 있으므로 인도네시아에 언제든 판매할 수 있다. K-21 보병전투장갑차를 만드는 한화펜스 이외에 신정개발특장차처럼 경찰용 장갑차를 만드는 국내 업체들도 있다. 이들을 앞세워 ‘패키지 딜’을 시도하자는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필요로 하지만, 부가가치 극대화를 노리는 프랑스가 제안하지 않는 장비들을 팔겠다고 하면 ‘패키지 딜’의 차별화도 가능하다. 여기에 금융지원을 추가하면 프랑스와 충분히 경쟁이 가능하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무기개발 사업인 KF-X는 숱한 반대 속에서도 내년 5월 시제1호기 출고를 눈앞에 둘 정도로 개발이 이뤄졌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만큼 해외에 한 대라도 더 팔아야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 수출된 잠수함의 후속 수주도 산업적 측면에서 중요하다.
어렵게 구축한 동남아 방산시장 교두보를 프랑스에 내주면 국내 방산업계는 해외에서 설 자리가 없다. 왕정홍 청장의 후임으로 임명된 강은호 방사청장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사안이 인도네시아 이슈인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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