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대로 된 감청 한 건은 500만달러의 가치가 있다.” 1950년대 미 국가안보국(NSA) 고위 간부가 동료에게 남긴 말에는 적국을 상대로 한 정보수집활동이 얼마나 어렵고 치열한 것인지 잘 드러낸다.
정보수집활동을 통해 확보한 첩보들은 대부분 국가기밀로 분류,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는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주둔 미군사령관이 본국에 “독일군은 도청의 귀재다. 통신과정에서 암호를 써야 한다”고 보고한 내용이 1996년에야 기밀 해제될 정도다.
문제는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 피격 사건처럼 뜻하지 않게 국가기밀이 세상에 드러나는 경우다. 국내에서는 정보수집활동에 큰 타격을 입히는 기밀 폭로나 유출 등이 반복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감청정보가 실전의 승패 좌우
이모씨 사건과 관련, 군이 수집한 SI(Special Intelligence) 첩보가 드러나면서 군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특수정보라고도 불리는 SI첩보는 무선 감청 등에 의해 수집된 단편적인 첩보다. 이 첩보들을 한데 모아 분석을 하면 군 수뇌부의 의사결정을 돕는 정보가 만들어진다. 북한군 동향 파악에 효과적인 SI첩보는 군 당국이 존재 자체를 공식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비밀 등급이 높다.
도청과 감청을 통한 정보수집은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공중에는 온갖 종류의 전자파가 날아다닌다. 이같은 상황에서 감청자료를 확보하려면 전파 특성과 교신 당사자들의 인간적인 요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매일 같은 사람들을 감청하면서 교신 당사자들의 습관, 기분, 어투, 속임수 등을 파악해야 가능한 일이다. 감청 대상이 순간적인 실수로 평문 송신을 하면 통신암호를 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어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수신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만큼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게 감청이다.
이렇게 확보한 정보는 실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2008년 콜롬비아군 정보국이 감행한 ‘하케’ 작전이 대표적이다.
총도 쏘지 않고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에 붙잡힌 인질들을 구했던 ‘하케’ 작전을 주도한 콜롬비아군 정보국은 FARC 통신병들의 음성과 배경음 등을 똑같이 모사, 거짓 명령을 내려 인질들을 감시하던 FARC 부대원들을 기만했다.
군 정보국이 20여년에 걸쳐 FARC의 통신암호체계를 해독하고, FARC 통신병들의 교신을 오랫동안 감청하면서 그들의 특성을 파악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같은 감청정보가 사전에 노출됐다면 ‘하케’ 작전은 입안조차 불가능했다.

◆기밀 유출 반복, 해결책 없나
이모씨 피격 과정에서 군이 확인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 정황이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계속 유출되자 “군사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국회 국방위원회와 정보위원회 관계자를 인용해 지난달 22일 북한 해군사령부가 단속정장에 사살을 명령하자 정장이 “다시 묻겠습니다. 사살하라고요? 정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북한군이 이씨를 밧줄로 끌고 갔다”, “소총을 의미하는 세 자리 숫자가 포함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군 당국은 진화에 나섰다. 국방부는 “첩보 사항에 사살, 사격 등의 용어는 없었다”며 “첩보를 임의로 가공하거나 무분별하게 공개하는 것은 군의 임무 수행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고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이번 사건이 기밀 유출의 첫 사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래 전부터 반복되어 왔으나 군과 정치권은 재발방지책 마련에 소극적이었고, 그 결과가 이씨 피격 사건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1996년 10월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당시 국방부가 비공개를 전제로 국회의원들에게 설명한 북한 무력 도발 시 응징 계획과 무인정찰기 부대 창설 방안이 외부에 유출됐다. 이에 검찰과 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수사에 나섰다.
1996년 하반기에는 기밀 유출이 잇따랐다. 같은해 9월 강릉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군 동향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결과다. 당시 의원들에게 비공개 보고한 군구조개편(2급 기밀)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고, 무장공비 소탕작전 관련 보안사항이 연일 보도되면서 SI첩보가 노출됐다.
당시 군 안팎에서는 “의원이나 언론이 군사기밀을 유출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치명적인 위해를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공무원 이씨 피격 사건에서 벌어진 기밀유출 논란과 매우 유사하다. 비슷한 일이 재발한 것은 군과 정치권이 군사기밀과 공유에 대해 20여년 동안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던 결과다.

기밀유출은 군 내부에서도 발생했다. 2018년 7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돈을 받고 군사기밀을 외국에 누설한 혐의(군사기밀보호법 위반)로 탈북민 이모씨를 구속했다. 이씨는 정보사 공작팀장으로 근무하던 황모씨 등으로부터 기밀정보를 넘겨받아 동아시아 국가 정보원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긴 혐의를 받았다.
황씨 등이 외국 정보원에게 넘긴 군사기밀은 109건. 해외 한국 공관에 파견된 정보관(화이트 요원) 신상정보까지 포함돼 정보 유출 대상이 된 정보관들이 급히 귀국해야 했다.
2015년 3월에는 기무사(현 안보지원사) 간부가 돈을 받고 해군과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관련 정보를 넘긴 혐의로 구속됐다.
2016년 1월에는 북한이 2015년 11월말 실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수중사출시험 정황을 특정 언론에 흘린 대북 정보부대 장교가 구속됐다. 시험 사실이 당일 오후 국내 언론에 보도됐고, 국회 정보위 보고를 통해 더 상세한 내용이 공개됐다.
이후 북한이 신호정보 체계를 바꾸면서 777사령부 등의 정보수집활동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 군 관계자는 기자에게 “언론 환경은 피아가 구별되지 않는다”며 격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차분한 위기관리 가능한 체계 만들어야
전쟁의 승패는 어느 쪽이 더 혁신적이며 변화에 잘 적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차분하게 위기를 관리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쪽이 이긴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보전쟁도 마찬가지다. 북한군 동향을 세세하게 살피고 기밀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씨 피격 사건처럼 돌발상황에서 정보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도 전쟁의 승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2010년 천안함 피격 당시에는 군이 정보유통을 철저히 통제했다. 그 결과 미확인 정보와 기밀사항이 여과없이 노출됐다. 국가안보가 스포츠중계처럼 다뤄질 정도였다. 군이 비밀을 지켜야 할 정보와 알려줘도 될 정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정보차단에 골몰한 대가였다.
지금은 천안함 피격보다 상황이 훨씬 복잡하다. 우리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북한의 ‘창조도발’ 위험이 여전한 국면에서 이씨 피격 사건처럼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한 돌발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디지털 체계가 발달하면서 군사기밀을 공유하는 속도와 범위 등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군사기밀을 군과 국회, 언론이 어떻게 다뤄야하는가에 대한 부분은 문민정부 이래로 별다른 변화가 없다.

국방부는 국회를 통해 군사기밀이 흘러나간다고 인식한다. 국회 등은 “정부 고위당국자가 발설하면 문제가 안되고, 국회나 언론을 통해 나가면 문제가 되느냐”고 비판한다. 이같은 인식의 간극은 20여년 동안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씨 피격 사건을 둘러싼 기밀유출 논란은 군과 국회, 언론 사이에 군사기밀의 정확한 개념과 한계설정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데 원인이 있다.
군이 비밀분류를 지나치게 많이 하면, 비밀을 다루는 군인들조차도 어떤 것이 기밀이고 어떤 정보가 공개 가능한 첩보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면 정보유통보다는 차단에 주력하게 되고, 국회나 언론 등을 통한 ‘스포츠중계식 국가안보사항 공개’가 이뤄진다.
이번 사건은 기밀 공개에 대해 군과 국회, 언론이 합의점을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증명했다. 기밀사항이 여과없이 공개되면 북한이나 주변국을 이롭게 하고, 한미 정보공유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반면 군의 정보수집활동을 기밀의 영역에만 남겨두면, 군의 첨단 정보수집 활동은 북한이 아닌 국내로 방향을 돌릴 위험이 있다.
지킬 정보는 철저히 지키고, 공유할 수 있는 정보는 적절히 공개하는 ‘견제와 균형, 집중’의 원리가 필요한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기밀 유지와 공개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일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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