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마음이 분다...가을 오는 길목 제주 풍경 속으로/섬속의 섬 우도의 푸른 바다와 하얀 등대 이국적 풍경/남태평양 휴양지 온 듯···연인들은 ‘추억’을 찍는 중/생텍쥐베리 탄생 120주년 ‘어린 왕자’ 보아 뱀 닮은 비양도 한적한 마을 풍경에 시간도 느릿/염습지 펄랑못·화산암 돌담길···고요함에 젖다

새벽 찬바람에 창문을 닫고 이불을 끌어 올린다. 멀리서 가을이 묻어오나 보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은 더욱 투명하고 높아지며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문득 제주 푸른 하늘과 바다가 눈물 나도록 그립다. 태풍이 지난 9월 제주 바다는 더욱 아름다워질 때. ‘섬속의 섬’ 비양도와 우도를 만나러 가는 길은 신비로 가득해 여행자들을 더욱 설레게 한다.


#보아 뱀 닮은 섬에 가면 어린 왕자를 만날까
제주의 섬들은 쉽게 여행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3일 여행하면 늘 하루쯤은 비가 내리고 강풍이 불 정도로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섬속의 섬들을 여행하려면 날씨 체크를 잘해 여행계획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 부는 9월부터는 여행자들의 천국이다. 협재해변과 금능해변에서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비양도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을 닮았다. 이 때문에 협재해변 등을 찾는 여행자들은 독특한 모양의 비양도 위로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한번쯤은 어린 왕자의 신비가 가득한 저 섬에 꼭 가보리라 마음을 먹게 된다.

비양도로 오가는 배편은 그리 많지 않아 시간 계산을 잘 해야 한다. 배를 타기 전 시간이 좀 남는다면 한림항에서 보말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여행을 시작하길. 보말은 고동의 제주방언. 보말과 싱싱한 미역, 오징어가 듬뿍 담긴 보말 칼국수 국물을 한 숟가락 떠 넣으면 제주 바다가 입안에 밀려온다.


한림항에서 출발한 배는 15분 만에 섬에 닿는다. 제주가 여행자들로 붐빌 때지만 한산하고 시간이 멈춘 듯한 비양도 마을풍경에 마음이 평화롭다. 협재해변에서 바라보면 섬은 좌우로 길쭉하게 보이지만 하늘에서 보는 비양도는 거의 동그라미에 가깝다. 면적은 0.59㎢, 해안선 길이는 3.5㎞인 작은 섬으로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섬 둘레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비양보건진료소 뒷길에서 시작한다. 15년 전 고현정, 지진희, 조인성이 출연한 드라마 ‘봄날’의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드라마 덕분에 한때 이곳도 여행자들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가장 먼저 만나는 아담한 학교는 한림초등학교 비양분교. 운치 있는 소나무가 울타리가 되고 운동장엔 잔디가 깔려 아름답지만 텅 비어 있다. 학급 수와 학생 수가 줄면서 2019년 3월부터 계속 휴교 중이다. 코로나19가 끝나고 아이들도 늘어 다시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해지는 모습을 그려본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걸으면 새하얀 기둥과 파란 몸통에 뻗어나간 날개도 하얀 풍력 발전기가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그리스 산토리니 이아 마을의 색들과 많이 닮았다.


이어 하늘과 구름이 담긴 펄랑못이 펼쳐진다. 바닷물이 스며들어 생긴 염습지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해송, 대나무, 억새가 어우러진 풍경이 가을을 재촉한다. 화산암으로 쌓은 돌담길은 오랫동안 머물라고 잡아끈다. 비양도는 제주 4개의 섬 중 가장 어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탄생 기록이 남아 있다. 1002년 6월에 바다에서 산이 솟았고 산꼭대기에 구멍 4개가 뚫려 붉은 물이 솟다가 닷새 만에 그쳤으며 그 물은 엉겨 모두 기왓돌이 됐다고 한다. 탄생설화가 더 재미있다. 중국에 있던 한 오름이 갑자기 날아와 협재 앞바다에 떨어졌다. 오름은 잘못 온 것을 알고 돌아가려고 휙 돌아서다 그 자리에 멈췄기에 비양도 오름은 돌아앉은 모습이 됐단다.


해변의 서쪽으로 갈수록 기암괴석이 가득하다. 용암 가스가 분출되면서 만들어진 호니토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해변을 꾸몄다. 직경 4m, 무게 10t짜리 초대형 호니토도 발견된다. 그중 높이 4.5m의 ‘애기 업은 돌’이 가장 유명하다. 어미는 아이를 등에 업고 바다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그 자리에서 굳어 돌이 된 듯 애처롭다.

#등대와 바람개비 언덕은 잊지 못할 추억되고
우도여행은 성산항에서 시작한다. 차를 실을 수 있는 커다란 도항선은 여행자들로 가득해 우도의 인기를 실감한다. 15분을 달린 도항선은 하우목동항에 여행자들을 쏟아낸다. 구석구석 둘러보려고 승용차를 성산항에 두고 왔기에 탈 것이 필요하다. 선착장에는 전기차, 스쿠터, 자전거 대여소가 넘쳐나는데 그중에 흥미로운 모양의 ‘삼발이 전기차’가 우도 여행에 딱이다. 스쿠터보다 운전하기 쉽고 자전거보다는 힘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선착장에서 시계방향으로 일주를 시작한다. 제주올레길 1-1 코스이기도 하다. 해변과 오름길을 오가며 달리면 섬 북쪽에 바람개비 언덕이 나타난다. 빨강, 노랑, 파랑의 바람개비가 제주 바람을 맞고 힘차게 돌아간다. 빨갛고 노란 벤치에 앉는 것만으로도 인생샷을 건진다. 영상을 꼭 남겨야 한다. 우도 바람소리가 한 치의 오차 없이 가득 담겨서다. 여행이 쉽지 않은 코로나19 시대에 우도가 생각나면 냉동실에 넣어놓은 아이스크림처럼 언제든지 꺼내 먹을 수 있다.


찍은 사진을 보면 바람개비 언덕 너머 하얀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보는 것보다 더 근사한 망루등대 앞에 서면 연인들이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려 바빠지는 시간이다. 남태평양의 휴양지에 온 듯하다. 울트라 마린 계열의 짙은 파랑인 ‘끌랭 블루’로 채색된 듯한 바다를 배경으로 눈부시게 서 있는 하얀 등대라니. 우도에 많은 여행지가 있지만 망루등대가 으뜸이다. 이곳에 오는 것만으로 우도 여행은 충분하다.


자주 삼발이를 세우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동쪽으로 달리면 인어와 해녀 조각상이 반기는 하고수동 해변이다. 드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물빛은 우도의 매력을 더한다. 수심이 얕아 해수욕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아직 제주의 한낮은 뜨거워 늦은 물놀이를 즐기는 이들이 눈에 띈다. 당일치기 여행이라면 시간이 많지 않기에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대신 삼발이를 인근 카페 우도몬딱에 멈추고 우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땅콩 아이스크림으로 아쉬움을 달래보자. 달콤하고 고소한 맛은 여행의 피로를 씻어준다.

포토존 ‘제주한량’도 놓쳐서는 안 된다. 짙은 민트 액자와 벤치에 앉아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우도 바다를 찍는 뒷모습은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문구와 함께 저장돼 근사한 추억을 오래 남긴다.

이제 우도에서만 만나는 태고의 신비 가득한 검멀레 해변과 동안경굴이다. 우도봉은 동쪽 바다를 향해 비스듬히 달리다 수직 절벽을 만들었다. 여기에 칠흑같이 검은 모래가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은 마치 아일랜드의 해변 어딘가에 선 듯하다. 절벽 곳곳을 뚫은 동안경굴은 바다색과 어우러져 장엄한 풍경이다.

우도봉 정상에 서면 1906년 3월 최초 점등한 우도등대를 만나고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바다와 성산일출봉도 한눈에 들어온다.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항선 탑승 시간에 쫓기다 보니 여행자들이 종종 놓치는 곳이 있다. 홍조단괴 해변과 서빈백사다. 홍조류가 오랜 세월 거치면서 지중해처럼 아름다운 해변을 만들었으니 꼭 가봐야 한다. 우도를 제대로 즐기려면 사실 1박2일은 머물러야 한다. 노을로 물들 때쯤 붉게 반짝이는 산호해변과 밤바다는 우도의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제주=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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