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親日).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사안이자 뜨거운 논란을 촉발하는 이슈다. 근현대사부터 예능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분야도 가리지 않는다.
군도 예외는 아니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지난 15일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대한민국은 민족 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됐고,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며 “서울현충원에서 가장 명당이라는 곳에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자가 묻혀 있다. 해방 후 군 장성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자”라고 지적했다.
김 회장은 지방 광복절 경축식에 보낸 기념사에선 “초대 육군참모총장부터 무려 21대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는 발언도 했다. 군 내부에서는 “군을 적폐로 모는 것이냐”며 반발하는 기류도 감지된다.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 토벌하던’ 총장은 누구?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것은 일본군에 지원해 독립군과 싸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초대~21대 육군참모총장들 중에서 이같은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초대 이응준 총장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1006명의 친일반민족인사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1914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해 1945년까지 복무한 이응준은 중국 전선에서 주로 복무했지만, 조선인 징병제를 적극 지지했고 1920년대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당시 현지에서 정탐활동을 했다.
당시 시베리아에서 일본군을 상대했던 볼셰비키 군대에는 독립을 원하는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사람에 포함될 수 있다.
제2, 4대 채병덕 총장은 193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사세보 등 일본 본토 방어부대나 병기공장에서 근무했다. 인천 부평 조병창에서 해방을 맞았다. 독립군 토벌과는 거리가 멀다.
제3대 신태영 총장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1006명의 친일반민족인사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신태영은 이응준처럼 1920년대 독립군 근거지인 북만주에서 정탐활동을 했고,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조선인들에게 일본군에 지원할 것을 촉구했다.
제5, 8대 정일권 총장은 1937년 일본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만주에서 헌병 장교로 복무했고, 중학교 졸업예정자들에게 “군에 입대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하고 현명한 길”이라고 말했다. 일제 시대 헌병의 역할을 고려하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사람에 포함될 수 있다.

제6대 이종찬 총장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임관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가해 훈장을 받았으나, 독립군을 토벌한 적은 없다.
제7, 10대 백선엽 총장은 1940년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는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를 토벌하는 부대로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때문에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1006명의 친일반민족인사 명단에 포함됐다.
제9대 이형근 총장은 194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독립군 토벌에 개입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제11대 송요찬 총장은 1939년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 훈련소 조교로 복무했다. 해방 당시 계급은 상사였다. 제12대 최영희 총장은 1944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제13대 최경록 총장은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해 준위로 복무했다. 이들은 독립군 토벌에 참가하지 않았다.
제14대 장도영 총장은 학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돼 중국에서 복무했다. 제15대 김종오 총장은 1944년 학병으로 입대, 해방 당시 소위로 복무했으나 전투에 참여할 기회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제16대 민기식 총장, 제17대 김용배 총장, 제18대 김계원 총장, 제19대 서종철 총장도 마찬가지였다.
제20대 노재현 총장은 일본군 경력이 없다. 제21대 이세호 총장은 1944년 일본 육군 특별간부후보생이었으나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다.
결국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할 만한 사람은 이응준, 신태영, 백선엽, 정일권 4명이다. 일본군에 스스로 입대한 채병덕, 이종찬, 이형근, 송요찬, 최경록, 이세호까지 포함해도 10명이다. 이 중에서 신태영과 이종찬 등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서울현충원에서 가장 명당에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자가 묻혀 있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지만,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초대 국방부 장관이 광복군 출신 이범석 장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군 창설 과정에서 친일파가 득세했다는 취지의 주장으로 군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일본군 출신을 모두 친일로 볼지,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자원 입대한 사람만 친일파로 분류할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대목이다.
◆객관적 평가 통해 공과를 함께 따져야
2005~2009년 활동했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독립운동가들을 대상으로 살해 및 위협을 하거나 미수에 그친 자 △반일(反日) 및 항일(抗日)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공격하거나 위협을 가한 자 등을 대상으로 친일 행위를 조사한 바 있다.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거나 학병 또는 지원병 응모를 유도한 자, 일제를 찬양한 자, 정탐활동을 한 자 등도 포함됐다.
백선엽, 신현준(초대 해병대사령관), 김석범(2대 해병대사령관) 등 간도특설대 출신과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중장까지 진급했던 홍사익 등은 친일 행위자에 포함될 수 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거나 지원병에 응한 사람들도 해당될 수 있다.
만주국군 출신도 있다. 1932년 일제가 만주국을 수립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 돈을 벌기 위해, 출세길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주목했던 곳 중 하나가 봉천군관학교와 신경군관학교다. 태평양전쟁 직후 전범으로 사형당했던 한국인 출신 일본군 장군 홍사익은 만주국군 고문으로 재직할 당시 이들 학교에 한국인 입학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고쳤다. 입학한 한국인 중 성적 우수자는 일본 육사에 유학할 수 있었다. 일제 시대는 군국주의 풍조로 군인은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이나 만주에 살던 한국인들이 적지 않게 지원했다.
박정희(신경2기·일본육사 57기), 정일권(봉천5기·일본육사 54기), 백선엽(봉천9기), 이한림(신경2기), 김석범(봉천5기), 신현준(봉천5기), 강문봉(신경5기) 등 건군 초기와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을 이끈 장군들이 만주국군 출신이다. 원용덕(만주군관학교)과 김창룡(관동군 헌병교습소) 등 다른 교육기관을 거친 사람도 있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이들은 해방 후 많은 공과를 남겼다.
이종찬은 일본군 장교출신이었지만, 해방 이후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집권 연장을 위한 부산 정치 파동 당시 이 대통령의 군대 출동명령에 응하지 않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다. 4.19 혁명 직후 국방장관으로서 3.15 부정선거에 개입한 군인들을 처벌했고, 12.12 쿠데타를 비판했다.
반면 원용덕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주도해 군의 정치 개입 선례를 남겼다. 특무대장으로 재직하며 군 내부에서 원한과 불만을 샀던 김창룡은 1956년 1월 암살됐다. 배후는 강문봉 2군사령관이었다. 강문봉은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정치인이 됐다.
5.16 쿠데타에는 박창암(간도특설대), 김동하(신경1기) 등이 참가했다. 박정희와 사관학교 동기인 이한림은 당시 1군사령관으로서 5.16에 반대하다 체포돼 예편했지만 1969년 건설부 장관이 됐다.

일본군과 만주국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했던 사람들은 일제에 스스로 협력했다는 과오가 있다. 해방 후 나라의 기틀을 잡고 6.25 전쟁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막았으며, 휴전 후 경제와 군사력 성장을 이끈 공로도 있다.
1948년 반민특위가 무너지면서 한국 현대사는 민족 정기를 바로 잡을 기회를 놓쳤다. 친일 청산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그렇다고 검증없이 일제 시대 인물들을 친일파로 낙인찍는 것은 위험하다. 그들의 생전 행적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분석해 공은 공대로 평가하고, 과오도 함께 살펴야한다. 그것이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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