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강, 우리네 삶과 흐르는구나
참으로 긴 장마였댔다. 2013년 이후 50일 넘게 이어진 장마는 처음이었다고 했다.
임진강이 넘친다고 했다. TV로 보여주는 임진강 유역 마을들은 집도 밭도 모다 물에 잠기고 복구 중에 또다시 수해를 입어 마을 분들을 망연자실하게 했다.
옛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임진강, 한강 유역에 엄청난 비가 내려 일대가 물에 잠기고 용산 상가며 역에 서 있던 열차들까지 물에 잠겨 버렸다 했다던가. 지금 내가 지하철 타고 지나치는 망원역은 1980년대만 해도 상습 물난리 지역이라 반지하들 물에 잠겨 가난한 사람들 시름 겨워했다더라.

그런데, 참, 내 책들은 어떻게 되었나. 파주 하고도 법원읍에서 더 들어간 어딘가에 부려둔 책들에 생각이 미치기는 임진강 범람 소식을 듣고도 여러 시간 지난 후다. 몇 년 전 큰비 오면 내가 넘친다고 이 책 정리해 둔 공장 옆 하천에 콘크리트 제방 높게 쌓는 것을 보아두기는 했지만 필시 흘러 흘러 임진강으로 들어갈 이 내도 그냥 무사할 수만은 없을 것도 같다.
마음과 달리 그곳은 트럭으로 달려도 학교에서 두 시간 반 이상은 족히 들어가는 곳, 큰물 소식 듣고도 뭐가 바쁜지 도무지 시간 낼 수 없다. 아니, 요즘 나는 뭔가 절망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시간이 생겨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끔찍한 심리 상태. 내 자신의 일 때문인지, 시대 탓인지 모를 복잡하게 뒤얽힌 심리의 깊은 계곡이다.
저녁 지나 날이 어두워질 즈음에야 비로소 한번은 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강을 따라 노들길로 가다 성산대교 건너 강북 강변도로 따라 자유로 쪽으로 향한다. 밤의 한강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수위에는 미치지 못하도록 많이 낮아졌다. 강은 이렇게 넘실거릴 때가 좋다. 유수지에 지어놓은 가건물들은 아직 강에 들어 있어 한강은 이름 그대로 도도함을 보여준다. 한강이 임진강과 합쳐지는 곳쯤 되리라 하는 곳에서 밤의 강은 한껏 넓어지고 이제 자유로는 군사용 철조망을 따라 파주, 문산 쪽으로 향한다.
문산 거의 다 간 당동 인테체인지 쪽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져 임진리 나루터 마을 표지판을 스쳐 지나 법원읍 쪽으로 다시 우회전을 한다. 이제 좁은 2차선 도로가 다른 길과 마주치는 삼거리 편의점에서 잠깐 커피 한 잔, 그러면 문제의 책공장.
굳게 잠긴, 한 달 내내 찾지 못한 공장은 다행히 물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방 안의 가방은 곰팡이가 슬고 벌레들이 비를 피해 숨어 들어왔다 생명을 잇지 못했다.
2층 형광등 넷 중 둘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새로 연결한 전선에 문제가 생긴 것, 그 공사 잘하는 노인 분께 연락을 드려야겠다.
평론하는 전소영 선생에게 주겠다 약속한 박미하일 선생의 케냐 풍경 그림을 건져내듯 들고 책장에서 꼭 필요한 책 몇 권 챙겨 들고 잠깐 방 안을 둘러보고 자주 오겠다 약속을 해준다.
돌아오는 길에 임진리 나루터 마을 화석정에 들러 불어난 강물을 눈에 담아 둘 생각이다. 일 하나는 끝낸 탓에 마음은 한결 느긋해졌다.
임진강은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휴전선 이남에서 한탄강과 합쳐져 서남으로 오다 황해바다 만나는 하구 끝에서 다시 한강에 이어진다. 엄격하게 따지면 한강의 지류가 되는 셈, 바다에 다 이르러 손수 제 힘으로 바다를 만나지 못하는 슬픔이 있다. 이렇게 임진강은 남북 모두에서 분단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어 있다.
그러나 강은 사람들의 이런 ‘사회적’ 심리는 오불관언 제 갈 길을 간다. 삼국시대 고구려, 신라의 쟁패장으로 ‘칠중하’라 불렸던 것도,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이 근처에서 전공을 세운 것도 다 강 그것과는 관계없는 일들이다.
사진을 보면 화석정에서 내려다보는 임진강과 강 건너 들판이 그렇게 시원스러울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은 캄캄한 한밤. 화석정을 지척에 두고 임진 나루터 쪽으로 내려가 밤의 임진강을 바라본다. 긴 장마를 뒤로하고 마을 집들은 편히 잠들었다.
나라의 흥망은 유수하나 강은 천 년을 두고 끊어짐없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으니, 오늘 우리의 복잡다단한 삶도 바로 이렇게 한숨과, 순식과 같으리라 한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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