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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관심 끌었지만… 따가운 시선·편견에 흉터로 얼룩져 [미투, 그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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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8-03 20:19:35 수정 : 2020-08-04 16: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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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미투 피해자’라는 낙인
‘바둑계 미투’ 코세기 초단, 가해자 사과도 못받아
고은 시인 성추행 고발 최영미 시인도 문단서 고립
‘연극계 거장’ 미투 폭로 박영희 연출가도 상황 비슷

‘그날 그 집에 가지 않았다면,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아니 이 모든 걸 그냥 내 안에 묻어뒀더라면….’

프로기사 코세기 디아나 초단의 지난 2년은 덧없는 가정으로 점철돼 있다. 코세기 초단은 2018년 프로기사 전용 게시판에 2009년 김성룡 전 9단으로부터 입은 성폭력 피해를 폭로했다.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때였고, 증인과 증거도 있으니 비록 9년 전 일이지만 사과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국기원 윤리위원회 조사과정 내내 ‘피해 당일 무엇을 입었는지, 피해 다음날 바닷가에는 왜 갔는지’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2차 가해성 질문에 시달렸고, 지금은 바둑계 변방을 떠도는 처지가 됐다.

2018년 초 미투 운동이 본격화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성범죄 폭로가 이어졌다. 언론은 소식을 전하기 바빴고, 인터넷에선 ‘피해자가 자초했다’는 꽃뱀론과 ‘피해자와 함께하겠다’는 연대의 글이 맞섰다. 그럴 때마다 각 단체는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노라 약속했다. 유명인들의 미투는 그들의 인기만큼 세상의 관심을 끌었지만, 과도한 신상정보 유출과 확인되지 않은 추측들로 본질이 흐려지기 일쑤였다. 피해자는 가해자뿐만 아니라 대중의 시선과 댓글, 편견과도 맞서야 했다. 2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미투 그리고 괴롭힘

코세기 초단의 미투 보도는 ‘한국기원이 보고서 전문을 재작성하고,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로 끝난다. 하지만 그는 이 일 이후 한국기원에 발을 끊었고, 시합에는 최소한으로만 참가하고 있다. 그가 정작 바랐던 가해 당사자와 보고서 내용에 동의한 동료 기사의 사과도 끝내 들을 수 없었다.

“(문제가 된) 윤리위 보고서를 지휘한 건 한국기원 이사로 있는 현직 검사였어요. 프로기사 3명도 윤리위에 참여했고요. 그런데 친하다고 생각한 그 기사들이 왜곡된 보고서에 동의한다고 서명을 했죠. 이 부분이 너무 아파요. 결국 보고서가 재작성됐으면 ‘미안하다, 그땐 나도 잘 몰라서 그랬다’라고 한마디 해줄 수 있는 거잖아요.”

헝가리 출신인 그는 “한국기원이 특이한 건지, 한국 문화가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뭐든 조용히 처리하고 넘어가려는 분위기가 있다. 게시판에 글 올린 걸 후회한다”고 했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혐의를 고발해 문화계 미투 운동을 일으킨 최영미 시인은 미투 이후 문단에서 더 고립됐다고 했다. “미투 이후 저에게 ‘투사’ 이미지가 고착돼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기업체로부터 강의요청이 끊겼고, 제 시집을 내주겠다는 문학전문 출판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1인 출판사를 차렸어요. 이제 확실히 왕따를 당한다는 느낌입니다.”

최 시인의 폭로는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법원 판단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단에서는 감히 거장을 건드렸다는 ‘괘씸죄’를 샀다. 그는 “소송 과정에서 대다수 문인이 침묵했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며 “이제는 날 찾는 문인이 아예 없다”고 말했다.

‘연극계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린 오태석 연출가의 성범죄를 고발한 박영희 연출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사실 과거에 겪었던 성적 괴롭힘보다 미투 이후 겪어온 2차·3차 피해로 인한 트라우마가 훨씬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 선생의 조력자를 자처하는 분들의 강도 높은 회유나 비난이 그랬고, 미디어의 야만적인 보도 행태도 고통을 안겼습니다. 공황장애, 불면증, 우울증 같은 불안요소가 생긴 것이나, 한국에서 저를 배우로 쓰는 것을 꺼리는 현상도 제 선택에 따른 부작용 같은 것이겠지요.”

신원이 드러난 미투 사건 피해자들은 집요한 악플에도 시달린다. 유명인 A씨는 “미투 이후 수입이 끊겨 생계를 위해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걸로도 너무 심한 악플을 받았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최근 가게를 내놔야 하는 상황이 됐다”며 “나도 사람인지라 너무 힘들고 무섭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손발이 다 잘려나가는 것 같아 괴롭다”고 했다.

◆계속되는 트라우마와의 싸움

고통스러웠던 미투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이들이 ‘미투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다. 여성인권 운동가로 변모했거나 정치에 뛰어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두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체육계 미투 1호로 알려진 김은희 테니스 코치는 초등학생 때 자신을 성폭행했던 테니스 코치를 2016년 고발해 징역 10년을 이끌어냈다. 이후 피해자 지원가로 활동해오며 총선을 앞둔 지난 1월에는 미래통합당(당시 자유한국당) 인재로 영입되기도 했다.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한 건 아니에요. 기억상실증에 걸리거나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 기억은 평생 갈 거예요. 끔찍한 기억에 압도될 때 예전에는 주변에 쉽게 털어놨는데, 요샌 함부로 내색하지 못해요. 이제는 사람들이 저를 피해자라기보다는 조력자로 바라보니까 그런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참고 있는데, 그게 어떨 땐 너무 버거워요.”

박영희 연출가는 올해부터 호주 브리즈번의 퀸즐랜드 공과대에서 ‘미투 시대의 연극 창작:안전한 창작환경을 위한 교차적 체계’라는 주제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미투 과정에서 겪은 고통을 직접 마주 보고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다. 이런 그도 어두운 기억을 몰아낼 수 없었다.

“지난 2년을 보내며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여간해서 극복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제 머릿속이 가해자의 목소리와 그때의 경험으로 점점 더 점령당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길동무 정도로 생각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되 더는 그것이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게 되니까요.”

◆“가해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원래 떠난 적이 없으므로”

성폭력 가해자와 2차 가해에 가담한 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코세기 초단을 성폭행한 의혹을 받는 김성룡 전 9단은 한국기원에서 제명된 지 넉 달이 지나 2018년 11월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그의 채널은 두 달 만에 구독자 1만명을 끌어모았고, 지금은 10만명이 넘는다. 유튜브 데이터 분석업체 ‘녹스인플루언서’에 따르면 그의 유튜브 예상수입은 월 1200만∼2000만원에 이른다. 프로기사 때보다 더 승승장구하는 그를 보며 코세기 초단은 참담한 심정이라고 했다.

“어쩌면 제가 좋은 길을 알려준 것 같아요. 10만 구독자가 누굴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아마 제 사건을 모르거나 그런 것쯤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겠죠. 그 사람 프로그램을 아이들한테 틀어주며 바둑을 가르치는 도장도 있다고 들었어요. 저도 유튜브와 트위치를 하지만, 혹시나 한국 사람들이 들어와 악플을 남길까 봐 영어로 운영하는데 말이죠.”

김 전 9단은 지난해 말 한국기원의 징계가 과하다며 소송을 냈다. 보고서 논란으로 한국기원 사무총장에서 사퇴한 유창혁 9단은 ‘레전드’로 분주히 활동 중이고,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임무영 검사는 여전히 이사를 맡고 있다. 윤리위 부위원장이었던 손근기 프로기사회장은 당시 해임될 뻔했으나 자리를 지켰고, 지난 2월 회장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김은희 코치는 보복이 두렵다고 했다.

“가해자는 (10년형을 선고받고도)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어요. 당연히 사과도 없었죠. 그래서 더욱 불안해요.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지, 보복 안 한다는 조건으로 선처를 해줘야 하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요. 특히 저는 신분이 다 노출돼 쉽게 소재를 찾을 수 있으니까 더 걱정되죠.”

박영희 연출가는 위계 구도를 만든 조직문화는 성(城)처럼 견고하다고 했다.

“그들은 수십년 동안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며 견고하고 높은 성을 쌓아 올립니다. 주변인들은 성에 금이 가거나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성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누군가 상처입고 고통 받아야 했던 이야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어쩔수 없는 일로 비하합니다. 피해자들은 성주를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수백, 수천의 주변인과 홀로 싸워야 하죠.”

‘성폭력반대 연극인 행동’의 홍예원 움직임 연출가는 성폭력 가해자의 복귀 가능성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저희끼리는 이렇게 얘기해요.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돌아오느냐’고요. 가해자와 한 편에 섰던 사람들은 지금 여전히 활동 중이에요. 어떤 이는 가명으로 극장을 열기도 했죠. 그들은 떠났지만 떠나지 않았습니다.”

 

특별기획취재팀=안용성·윤지로·정지혜·박지원·배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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