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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역사-8월3~9일] 프랑코의 ‘스페인 외전(外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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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8-02 22:33:45 수정 : 2020-08-03 10:3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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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8월 9일 프랑코가 스페인의 국가주석(총통)에 취임한 것은 그가 스페인 내전에서 완전히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외전(外戰)’이 남아 있었다. 내전을 통해 ‘파시스트’로 낙인찍힌 그는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미·영 등 연합국과 독·이 등 파시스트 국가들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할 판이었다. 실은 ‘내전’도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자체는 끝났으나 좌파들의 떼죽음은 1975년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1940년 스페인을 방문한 한 독일 고위층도 그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그 인물은 공교롭게도 게슈타포 총책으로 훗날 홀로코스트를 지휘할 하인리히 힘러였다.

결과적으로 프랑코는 홀로코스트의 선배가 된 셈이었다. 이 스페인 판의 홀로코스트는 가톨릭의 ‘축복’을 받으며 자행된 점이 특이하다. 가톨릭계와 보수언론은 “병적인 요소들의 척결과 정화”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래선지 프랑코는 하늘의 도움을 받은 듯 운도 좋았다. 유럽 강대국들이 2차 대전의 상황에 몰려 그의 이런 학살에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 그 첫 번째 행운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도 그의 행운은 이어졌다.

파시스트 국가들을 짓밟고 승리한 연합국이 스페인 내전 당시의 파시스트적 만행도 응징해야 할 시점에 냉전이 시작된 것이 그것이다. 그 바람에 연합국이 오히려 스페인에 추파를 던지는 모양새도 비쳤다.

여기엔 프랑코의 성품도 한몫했다. 프랑코라면 누구나 “나는 신과 역사 앞에만 책임을 진다”는 어록을 떠올린다. 그 어록에 비친 프랑코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근엄의 화신 같지만 그는 강자 앞에서는 비굴할 줄도 알고 교활한 면도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에게 묶이지도 않고 연합국에 찍히지도 않은 채 난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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