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향한 노력 ‘희극’ 원동력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대배우는 그냥 되는 게 아닌가 보다. 인생에 대한 통찰이 놀랍다. 나는 인생이 희비극으로 뒤엉킨 덩어리이고, 보는 방식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아직은 커피의 쓴맛이나 담배의 매캐한 연기를 겪어보지 못할 만큼 어리고 늦된 나이에 이미 불행과 그 무게에 허덕거리고 있었다.
내 안의 ‘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고, 인생은 다중적이고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한 심리학자는 인간이 경험하는 자기(experiencing self)와 기억하는 자기(remembering self), 즉 두 개의 자기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스무 살 때 의사단체가 펴내는 주간신문 기자 시험에 응시했다. 시험 장소는 서울시내 공립중학교였다. 구름떼같이 모여든 응시생 틈에 끼여 국사와 영어와 상식과 논문 따위의 시험을 치렀다. 초여름이었던가? 하늘은 파랗고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가운데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오는데, 운동장에 쏟아지던 햇빛은 왜 그리도 하얗던가! 머리 위에서는 지칠 줄 모르는 태양이 빛나고, 운동장은 빛으로 끓고 있었다. 그 찰나 ‘삶은 빛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과 ‘인간은 불행하다’라는 각성이 동시에 전류처럼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 기억이 뇌에 각인된 채 남아 있다. 백수로 빈둥거리며 시립도서관이나 기웃거리던 시절이다. 일자리가 간절해서 시험을 봤는데, 준비가 덜 된 탓에 낙방했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방황하던 그 시절,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 몸 뉘여 잠들 수 있는 나만의 작은 공간, 작가 등단… 그게 꿈의 전부였다. 그 소박한 꿈마저 내 처지에서는 요원한 것이었다. 방황은 몇 해 더 지속되었다. 마침내 나는 등단의 꿈을 이루고 출판사 말단 직원으로 취직을 했다. 날마다 출근하고 달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을 얻은 것이다. 스무 살 때 갈망하던 것을 손에 거머쥐었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삭막하고 삶은 팍팍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는 여전히 불행했다.
심리학자 에릭 클링거의 “인간의 뇌는 목적 없는 삶을 견딜 수 없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인간이 생존과 번식을 넘어 의미를 지향하는 존재라는 것은 많은 철학자가 말한 바다.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이나 윤리학이 그토록 오랫동안 번성한 이유이기도 할 테다. 군대에서 잘못을 저지른 병사에게 땅에 정방형의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완성하면 다시 메꾸는 벌을 내린다. 다음 날 그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시키는 것인데, 많은 병사가 다른 벌보다 그 벌을 더 고통스러워한다고 한다. 의미 없는 행동으로 이루어진 시간들, 의미가 배제된 삶이란 이미 죽은 삶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담보된다면 고통도 견디고, 심지어 제 생명마저 희생하는 게 인간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물질이 아니라 의미로 풍부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의미로 가득한 삶만이 인생의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인생의 여러 고비를 거쳐 노년의 초입에 서 있다.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커피의 쓴맛에서 인생의 비극과 희극의 기미를 가늠하며 여기까지 떠밀려 왔다. 이 나이를 먹도록 사람으로서 알 수 없는 것들을 모른 채 인생을 꾸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영원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겨우 죽어가는 일의 두려움에 대한 한 점의 실감만이 있을 뿐이다. 정직하고 근면한 동료와 함께 일하는 즐거움, 내일도 이 세계가 질서와 조화 속에서 온전하리라는 신뢰, 여름에는 달콤한 복숭아와 자두를 먹을 수 있으리라는 설렘 속에서 의미에 대한 기대는 부푼다. 의미의 실체는 이런 설렘과 기대, 낙관과 긍정의 기분을 성분으로 하는 만족감이다. 굳이 불행해지고자 애쓰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행복을 안달복달 구걸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의미의 존재가 되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자 한다.
장석주 시인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