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살해당했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비슷한 살인을 항상 보아온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그들의 입장에 동의하는 많은 백인도 함께 분노했다. 그들은 거리로 나갔다. 미국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많은 도시에서 시위는 폭동으로 이어져 도시 곳곳이 불탔다. 처음 보는 바이러스가 퍼졌고, 가난한 흑인들이 가장 큰 피해자들이었다. 이런 혼란한 사회와 상관없이 미국의 과학기술은 날로 발달해서 새로 개발된 로켓으로 인간을 우주에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 일어났다. 공화당 후보는 “법과 질서”를 외치며 폭력시위를 엄단하겠다고 외쳤다. 1968년의 일이다.
많은 독자가 눈치챘겠지만, 위의 내용은 2020년으로 바꿔도 전혀 다르지 않다. 1968년에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백인인 제임스 레이의 총에 맞아 숨졌다면, 2020년에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위조지폐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백인 경찰의 무릎에 8분 넘게 목이 눌려 숨을 거뒀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많은 도시는 시위와 폭동으로 얼룩졌고, 2020년에 중국에서 건너온 바이러스로 (이 글을 쓰는 현재) 11만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1968년 당시 미국에서는 홍콩에서 건너온 H3N2 바이러스가 미국 사회를 휩쓸어 10만여명이 숨졌다. 2020년에는 테슬라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인간을 달과 화성에 보내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유인우주선을 발사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1968년에는 미항공우주국(NASA)이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아폴로 8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아폴로 11호가 달착륙에 성공한 것은 이듬해인 1969년이다)

2020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대를 향해 무력을 사용하겠다며 “법과 질서(law and order)”를 외치고 있는데, 이는 1968년에 리처드 닉슨 후보가 시위대를 겨냥해 사용한 문구다. 닉슨은 1950년대 아이젠하워 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냈지만, 1960년 선거에서 존 F 케네디에게 패했다. 8년을 절치부심한 끝에 출마한 그는 이번에는 JFK의 동생인 로버트 F 케네디(RFK)를 만나 패할 뻔했으나 로버트 케네디가 경선과정에서 암살당하는 바람에 그해 말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당선된 닉슨은 잘 알려진 대로 4년 후 재선을 노리는 과정에서 민주당 선거본부를 도청하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를 숨기려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 사임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미국인들은 닉슨을 역사상 가장 부패하고 수치스러운 대통령으로 기억했다.
미국을 뒤흔든 1960년대가 끝난 1970년, 20세기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로버트 라우션버그(1925∼2008)는 ‘표상들(Sings)’이라는 판화 작품을 발표했다. 원래는 한 잡지의 표지로 기획된 작품이었지만 무산되었고, 250개의 한정판 다색판화로 만들어졌다. 그는 이 작품을 “지난 10년 동안의 사랑과 공포, 그리고 폭력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2020년을 사는 미국인들은 너무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한 해에 일어나고 있어서 그 어느 해보다 길게 느껴진다고 하지만, 1968년을 포함해 1960년대는 현대 미국인들에게 역사적으로 가장 길었던 10년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라우션버그의 작품은 그 60년대를 상징하는 사건들을 모아놓은 작은 역사책이다.

작품의 맨 아래 오른쪽에 등장하는 녹색 잔디밭 사진은 텍사스주 댈러스 시내로, 존 F 케네디가 자동차 퍼레이드를 하던 중에 암살당하는 장면의 일부다. 그 바로 위에는 JFK의 옆모습이 등장하고, 그의 얼굴 왼쪽으로는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 사이를 뚫고 튀어나와 있는 손은 그들 위에 얼굴이 크게 보이는 로버트 케네디의 것이다. 1968년 민주당 경선에 나선 로버트 케네디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월남전을 포기하고 병사들을 미국으로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인권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로버트 케네디는 사실은 형(JFK)의 집권 기간에 법무장관으로 있으면서 마틴 루서 킹과 같은 흑인 인권운동가를 감시하며 도청을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형이 죽고 백악관을 나와 상원의원으로 일하면서 인권운동에 눈을 뜨고 킹 목사와 함께 흑인들의 인권과 처우 개선에 앞장서면서 전혀 다른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968년에 대선에 출마하면서 캘리포니아의 멕시칸 노동자들, 뉴욕 슬럼가와 미시시피 델타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흑인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굶주리고 희망을 잃은 미국 원주민들의 인권을 외치며 이들에 반발하는 중서부의 백인들을 설득했다.
그러던 중 킹 목사가 암살당하고 도시마다 폭동이 발생했다. 온 미국이 혼란에 빠지고 군병력이 탱크를 몰고 수도인 워싱턴까지 진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왼쪽 상단에 지프를 탄 군인들이 그들이다. (그들 바로 위에는 시위대의 촛불집회가 보인다). 사람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흑백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후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백인과 소수민족 모두에게 공감하고 그들과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가능해 보였던 민주당 경선의 승리도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킹 목사가 암살을 당한 지 정확히 두 달 만에 그의 횃불을 이어받았다는 로버트 케네디도 예비선거 승리를 축하하던 중 괴한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된다.
작품 맨 아래, 관에 누워 있는 킹 목사의 시신, 그리고 바로 위에 셔츠가 피로 범벅이 된 채 땅에 엎드려 있는 흑인이 문자 그대로 피로 얼룩진 1960년대를 상징한다면 화면 왼쪽 아래에 등장하는, 달에 착륙한 우주인 닐 암스트롱의 모습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선 미국 과학기술을, 그리고 맨 꼭대기에서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재니스 조플린은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문화의 승리를 상징하는 ‘표상’들이다.

라우션버그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유명한 평론가 로버트 휴스는 그를 “미국 민주주의를 그린 아티스트”라고 부르면서 그가 “(미국 민주주의의) 요란함과 모순들, 희망과 엄청난 자유에 충실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휴스가 설명에 사용한 요란함, 모순, 희망 같은 단어들이 고스란히 표상, 혹은 이미지로 변신해서 라우션버그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라우션버그는 자신이 이 작품을 만들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서 “위험은 망각에 있다”고 했다. 지금 미국인들은 2020년이 1968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무나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라우션버그가 경고한 것처럼 역사적 교훈을 망각했기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일지 모른다. 미국인들은 지금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한 해를 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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