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 때도 이렇진 않았어요.“

경기도에서 올해로 40년째 장미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A(70)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피해를 묻는 질문에 1998년 외환위기 당시를 떠올렸다. 22년 전보다 더 힘들다는 것이다.
A씨는 평년 같으면 졸업시즌에 장미 2500단에서 3000단을 수확해 시장에 낸다. 올해 2월에는 평년보다 절반 정도만 시장에 보내고 나머지는 폐기했다. 평년 같으면 장미 한 송이에 800원꼴로 한단에 8000원 정도이던 것이 올해는 6000원대로 떨어졌다.
“전기에, 기름때고 해서 겨우내 꽃을 피웠는데 졸업시즌이 송두리째 없어져 버렸어요. 장미가 졸업식장에서 꽃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데 농장에서 바로 쓰레기가 됐어요.”

졸업시즌이 끝이 아니었다. 3월 입학식도 5월 어버이날, 스승의날, 로즈데이 등 각종 기념일까지 코로나19 여파가 계속됐다. A씨는 “코로나19 초기에는 꽃이 안 팔려서 어떡하느냐고 걱정해주던 지인들도 나중에는 사람이 죽는데 장미 안 팔리는 걸 어떡하겠느냐고 하더라”면서 “전기료가 체납돼서 1500만원을 대출받았다. 그만큼 어렵다”고 했다.
◆꽃 거래량·가격 급락… 동네꽃집부터 농가까지 휘청
화훼 농가도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다. ‘대목’이라고 불리는 졸업, 입학 시즌부터 5월 가정의 달까지가 코로나19와 함께 지워져 버렸다. 출하를 기다리던 꽃들은 폐기돼 비료가 됐다.
4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양재 화훼공판장을 기준으로 지난해 2월 일평균 17만950단이 거래되던 절화(꺾은 꽃)류가 올해 2월에는 11만4199단 거래되는 데 그쳤다. 전년 동월 대비 33.2% 감소했다. 3월에도 10.7%가 줄었고, 4월에도 3.0%, 5월에도 4.5%(25일 기준) 감소했다.

도매가격도 내렸다. 장미의 경우 지난해 2월 한 단에 8463원이던 것이 올해는 6647원으로 21.5% 떨어졌다. 3월에 -15.3%, 4월엔 -5.4%, 5월에는 -4.4%를 기록하며 내림세가 이어지고 있다. 카네이션은 지난해 2월 4018원이던 것이 올해 2월엔 2912원으로 27.5% 폭락했다.
화훼 농가는 2016년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시행으로 ‘애꿎은’ 피해를 보았다. 2018년 농·축·수산물과 가공품에 대한 선물 한도가 10만원으로 늘며 숨통이 트였는데 코로나19가 시장을 덮쳤다.

양재화훼공판장 관계자는 “동네 꽃집이 잘되면 도매시장으로 영향이 오고, 도매시장은 경매시장으로, 농가로 연쇄 작용이 일어나는데 위축되면서 농가까지 다 어려워진 상황”이라며 “코로나 확산이 꺾이고 정책 지원이 이뤄지면서 점점 상황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지난해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책상 하나에 꽃 한 송이’ 정부부처 안간힘
“청와대에 배달된 장미 꽃다발을 국민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달 20일 문재인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장미 꽃다발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이다. 문 대통령은 “노란 장미는 완벽한 성취를 뜻하고, 하얀 장미는 ‘다시 만나고 싶다’는 꽃말을 가졌다고 한다”며 “지금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우리 기술로 재배한 우리 품종의 장미 꽃다발처럼 희망이 아름답게 꽃피면 좋겠다”고 썼다. 농촌진흥청이 순수 우리 품종을 길러내 문 대통령에게 보낸 장미를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다. 화훼 농가를 돕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정부도 화훼 소비 촉진 대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농식품부는 지난 2월 농식품부, 소속·산하기관, 농협 등(21개 기관)이 우선적으로 ‘사무실 꽃 생활화(1Table 1Flower)’, 화훼장식 등을 통해 370만송이를 집중 구매하는 내용를 포함해, 화훼 농가 시설자금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4월에는 공공부문 화훼 구매를 농식품부 중심에서 정부·지자체·공기업 등 전 공공부문으로 확대했다. 지난 2월부터 5월 말까지 농식품 관계기관만 620만송이의 꽃을 구매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장애인, 노인 거주 사회복지시설 1000여곳을 대상으로 ‘꽃바구니’를 지원했고, 학교 개학이 시작됨에 따라 특수학교를 대상으로 ‘1교실 1꽃병’도 지원해 학생들의 심리적 안정을 도모할 계획”이라며 “화훼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꽃 소비의 일상 생활화가 중요하다고 보고 이번의 꽃 소비 활성화가 일반 가정에서의 꽃 생활문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꽃 안 사는 한국인… 1인당 소비액 年 1만2000원 그쳐
우리 국민은 1년 동안 꽃을 얼마나 살까.
4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국내 연간 1인당 화훼 소비액은 1만2000원이다. 장미 한 송이가 3000원이라고 하면 1년에 네 송이 정도를 사는 셈이다. 1인당 화훼 소비액은 2005년 2만1000원을 정점으로 꾸준히 하락해 2016년 1만2000원을 기록한 뒤 그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6년을 기준으로 연간 1인당 화훼 소비액은 스위스가 18만4000원, 네덜란드 11만원, 독일 13만6000원, 미국 11만원, 영국 9만8000원 등이었다. 일본도 5만6000원으로 우리나라보다 4배 이상 많았다.
국내 화훼산업은 2005년을 정점으로 위축되고 있다. 2010년까지만 해도 화훼류 수출액이 1억300만달러에 달하며 수출 유망품목으로 꼽혔지만, 지난해엔 1700만달러 수출에 그쳤다. 2010년 4500만달러 수준이던 수입액은 지난해 8700만달러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우리나라 화훼산업 위축의 가장 큰 원인으로 ‘꽃 소비문화’ 부재가 꼽힌다. 안정적 소비 기반인 가정용 소비가 적고, 행사용이나 선물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코로나19와 같은 외부 변수가 화훼시장을 크게 흔들어 놓는 것도 같은 이유다.
농촌경제연구원이 절화(꺾은 꽃)를 기준으로 소비자의 구입목적을 조사했더니 ‘집안 장식용’은 22.2%에 그쳤다. 선물용이 38.7%, 행사용이 22.9%를 차지했다. 취미생활 5.0%, 학교·사무실 장식용 6.1%, 충동구매 4.8% 등이었다.
경제적인 여건이 개선되면 화훼 소비를 늘리겠다는 응답은 58.7%였고, 경제여건이 개선돼도 화훼 소비를 늘리지 않겠다는 응답도 16.2%였다. 농촌경제연구원 박기환 농산업혁신연구부장은 “국내에는 꽃을 사치재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며 ”꽃 소비와 생산이 동시에 줄어드는 현재 같은 흐름이면 국내 꽃 시장은 향후에 해외 시장에 잠식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화훼산업 발전 및 화훼문화 진흥에 관한 법률’을 제정·공포하고 올해 8월부터 시행한다. 박 부장은 “화훼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생산 측면에서는 기술력을 갖춘 농가 등을 대상으로 정부 지원이 뒤따라야 하고, 유통분야에서도 거점시장을 만드는 등 시장 정비도 필요하다”며 “수출 유망품목으로서의 화훼산업 발전도 이뤄져야 하고, 중장기적으로 꽃 소비문화를 위한 교육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박영준 기자 yjp@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