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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은 생계 막막한데… 공무원은 ‘묻지마 공로연수’ 논란

입력 : 2020-05-04 23:00:00 수정 : 2020-05-06 10: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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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급휴직에 年 3000억 투입 특혜 지적 / 공무원 퇴직 전 1년 출근 않고 보수 받아 / 당사자 재량 맡겨 일부 ‘먹고 놀고 쉬기’ / 일부 지자체, 수천만원 들여 여행지원도 / 지자체 연수인원 3년새 42% 늘어 4076명 / 조기 퇴직 관례… 인사적체 해소 변질도 / “공직 노하우 전수 등 활용안 모색해야”

‘오스트리아 쇤브룬 궁전 탐방, 체코 시청사·구시가지 탐방, 헝가리 다뉴브강 야간 크루즈…’

지난해 4월 대구 달서구청 공무원 15명이 떠났던 동유럽 탐방 일정이다. 휴가자들을 위한 여행사의 관광 프로그램처럼 보이는 이 일정은 세금이 투입된 ‘연수’ 일정이었다. 이들은 퇴직을 앞둔 공무원에게 사회에 적응할 시간을 주는 ‘공로연수’를 떠난 길이었다. 이들이 7박9일 동안 동유럽을 도는 데 달서구가 한 명당 200만원씩 총 3000만원을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혈세 낭비라는 지적이 나왔다.

공무원 공로연수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제도의 충실성에 물음표가 달리고, 취지와 달리 공무원 조직의 인사적체 해소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일부 공무원은 월급을 받으며 쉬는 기간으로 여기는 등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국민 혈세 낭비 vs 꼭 필요한 제도’

공무원 공로연수제란 정년 퇴직을 앞둔 공무원(20년 이상 근속)이 사회적응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퇴직 전 6개월∼1년 동안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교육 등을 받을 수 있으며, 이 기간 공무원 신분이 유지돼 현업수당을 제외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

4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자체 공로연수 인원(지방직)은 2018년 4076명으로 3년 전(2015년 2867명)보다 42.2%나 늘었다. 정부 부처나 시·도교육청 인원까지 합치면 연간 6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돈은 1년에 3000억원가량이다.

공로연수제는 취지를 제대로 살리면 좋은 제도이나 실상이 그러지 못하다는 게 문제다. 공로연수 대상자들은 연수기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를 ‘각자 알아서’ 계획해야 한다. 행안부 예규에는 ‘60시간의 합동연수’와 ‘사회공헌활동 20시간’만 의무사항으로 정해져 있을 뿐이다. 나머지 시간은 당사자 재량에 맡기다보니 실제 전문기관 등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해외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대구 달서구의 사례처럼 아예 지자체에서 여행을 보내주는 사례도 있다. 제도 도입 취지는 ‘연수(練修: 인격, 기술, 학문 따위를 닦아서 단련함)’에 방점이 찍혀 있지만 현장에서는 사실상 ‘공로(功勞: 일을 마치거나 목적을 이루는 데 들인 노력과 수고)에 방점이 찍혀 ‘퇴직 전 꿀맛 나는 휴식’ 관행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 때문에 국민 혈세로 급여를 받으면서 장기휴가를 즐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제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도 있다. 일반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김모(42)씨는 “누구나 오랜 기간 일한 직장에서 퇴직 후 사회 적응기가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공무원이라고 더 힘든 것은 아니지 않으냐”며 “월급을 주면서까지 적응 시간을 주는 것은 특혜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공무원 노조 측은 비용적 측면만 부각해 공로연수제를 비판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김창호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대변인은 “공로연수제는 평생 국가를 위해 헌신한 공무원이 퇴직 전 사회 적응과 재취업을 준비하는 시기”라며 “꼭 필요한 제도”라고 강조했다.

◆인사적체 해소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공무원이라고 모두 공로연수제를 반기는 것도 아니다. 공로연수는 인사상 파견근무에 해당돼 누군가 연수를 떠나면 그 자리에 결원을 보충하면서 다른 직원들의 연쇄 승진이 가능하다. 일각에서 공로연수제를 공직사회의 인사적체 수단으로 인식하는 이유이다. ‘1년 먼저 승진하고 1년 먼저 퇴직하는’ 것이 관례가 되면서 경험이 풍부한 공무원을 조기에 퇴출하는 제도로 변질돼 도입 취지가 무색해진 것이다.

공무원사회에서는 승진이 가장 큰 보상인 만큼 이 고리를 끊는 것이 쉽지 않다. 공로연수 대상자도 대부분 상사의 공로연수로 1년 먼저 승진했기 때문에 공로연수를 거부하면 후배들의 승진을 막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남더라도 반발하는 후배들의 눈칫밥을 먹어야 한다. 공로연수를 원하지 않아도 떠밀리듯 나갈 수밖에 없는 공무원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2018년 공로연수제도를 이용해 공직을 떠났다는 A씨는 “말이 연수지, 사회적응이란 게 추상적이어서 연수기간 동안 효율적으로 시간을 보내기가 어렵다”며 “내가 연수를 떠나지 않으면 후배들 앞길을 막는다는 비난이 나올 수 있어 별 수 없이 나왔다. 공직 생활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게 아쉬웠다”고 토로했다.

공로연수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수년째 나오고 있지만 정부가 쉽게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다. 행안부는 지난해 6월 △공로연수 대상자 ‘20년 이상 근속 공무원’으로 한정 △사회봉사활동 시간 20시간 의무화 △연수비용 지원 기준 구체화 등 제도를 일부 개선했지만 제도 자체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

은재식 우리복지시민연합 사무처장은 “공로연수제도는 공직사회의 적폐로 보는 국민적 인식이 큰 것이 사실”이라며 “차라리 중간에 안식년이나 휴가를 주는 방안을 모색하는 등 새로운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창덕 영남대 교수(사회학)는 “맹목적으로 제도를 없애기보단 양측이 이해할 만한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공무원의 공직 노하우를 사회로 돌려주는 방안을 모색하는 등 정부가 제도를 꼼꼼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김일권 양산시장(가운데)과 공로연수 중인 공무원들이 최근 코로나19 방역활동을 펼치고 있는 모습. 경남 양산시 제공

◆연수 성과물 제출·사회공헌 활동 의무화

 

공로연수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서 각 지자체에서 제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울산시 울주군은 올해부터 개선된 공로연수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4일 울주군에 따르면 기존 공로연수제는 ‘5급 이상 공무원’이 대상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전 직급을 대상으로 확대됐다. 연수기간은 기존에는 ‘1년 의무’였지만 ‘6개월 의무’로 바뀌어서 6개월∼1년 안에서 선택이 가능하다. 연수 내실화를 위해 연수 성과물 제출도 필수로 했다.

 

내부 반응은 긍정적이다. 울주군의 한 관계자는 “인사 적체 해소 등 후배들 눈치가 보여 무조건 공로연수에 들어가야 했던 공무원들은 더 일할 수 있게 돼 좋아하고, 퇴직 시점까지 무조건 일해야 했던 6급 이하 공무원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좋게 보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기존안대로라면 올해 6월부터 1년간 공로연수를 가야 했던 4급 공무원 3명은 6개월 연수를 선택했다.

 

경남도는 공로연수제를 ‘지역사회공헌제도’로 개선해 운영 중이다. 공로연수자들이 연수 기간 도내 지역발전사업이나 자원봉사, 강의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공로연수자들을 도내 자원봉사센터나 시민단체와 연계해 자원봉사·시민운동 지원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신규 공무원과 일대일 멘토·멘티 결연을 맺는 등 공직생활에서 쌓은 노하우를 후배 공무원들에게 전수하도록 하고 있다.

 

경남 양산시의 경우 지역사회공헌활동을 정부 지침보다 3배 많은 60시간 이상으로 의무화했다. 1년간 공로연수를 떠나는 이들은 120시간의 사회공헌활동을 채워야 한다. 양산시의 공로연수자들은 은퇴교육을 이수한 뒤 관내 사회복지시설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목욕 봉사와 배식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최근에는 주요 다중집합시설을 돌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자원봉사에 나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유나·배소영·이보람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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