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과 물, 불, 번개와 같은 에너지를 뿜으며 한자리에 모인 무사들로 전시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무공(武功)을 휘두르는 협객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근원이 되는 문자들이 인물 형태를 이루고 있다. 손동현의 신작들은 그림이자 문자이고, 글을 쓰는 재료인 먹과 잉크로 만든 살아 있는 생명체다.
동양화 기법을 토대로 현대적인 화재(?材)를 재구성하는 등 동서고금을 초월한 작업들을 선보여온 손동현의 개인전 ‘Ink on Paper Ⅱ’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갤러리2에서 12일 개막했다.
전시 제목은 ‘지본수묵(紙本水墨)’의 영어 표기법으로, 2015년에 열린 개인전 ‘Ink on Paper’의 연장이다. 작가는 당시 동양화의 매체와 기법을 활용한 실험적 수묵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번 전시 역시 그림의 주제가 아닌 매체에 대한 실험에서 출발한다. 작가가 종이와 먹뿐만 아니라 서구의 잉크를 처음 사용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자리이다. 다양한 색의 잉크를 한 화면에 사용하거나 먹과 잉크를 섞었고, 동양화의 전통적인 작화법을 잉크로 표현하기도 했다.
잉크는 작가에게 ‘그리기’와 ‘쓰기’, ‘이미지’와 ‘문자’의 관계를 탐구하는 계기가 됐다. 잉크는 먹과 달리 채색용과 필기용으로 나뉘지만 손동현은 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실제의 대상을 본떠 만들어낸 상형문자처럼 정교한 소통이 가능한 그림이 바로 문자라고 작가는 말한다. 먹은 선의 운용을 통해 문자가 되기도 하고 형상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작가는 서구의 잉크를 더해 쓰기의 단계를 더욱 확장시키며 자신의 묘법(描法)과 필법(筆法)을 동시에 보여준다.

손동현이 선보인 이번 작품들 역시 그림인 동시에 문자이다. 글자와 그림의 기원이 같고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서화동체론(書畵同體論)과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을 그래피티 형식을 차용하여 쓰며 그린다. ‘Scarlet Crimson’은 붉은 잉크를 사용해 붉은색을 뜻하는 한자 적(赤), 홍(紅), 단(丹), 주(朱)를 배치해 그래피티로 풀어낸 작품이다. ‘용’(龍) 시리즈 중 하나인 ‘Scales’는 용자의 초서체를 따라 작은 형상들이 이어지는데, 이는 용이 81개의 비늘을 가졌다는 기록에서 유래했다.
문자는 작가의 손을 거쳐 추상화되고, 다시 인물화로서 구상화되기도 한다. 먹과 잉크를 통해 문자와 형상은 생을 부여받으며, 작가는 대상의 성격과 상황을 설정한다.
‘D.R.A.G.O.N.’, ‘Emperor’. 이 두 작품은 한자 ‘용’(龍)에서 파생된 그림이다. 중국 위나라 때 장읍이 지은 ‘광아(廣雅)’에서는 용의 머리는 낙타(駝), 뿔은 사슴(鹿), 눈은 토끼(兎), 귀는 소(牛), 목덜미는 뱀(蛇), 배는 큰 조개(蜃), 비늘은 잉어(鯉), 발톱은 매(鷹), 주먹은 호랑이(虎)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D.R.A.G.O.N.’은 이 아홉 동물의 한자를 각 위치에 배치해 가상의 존재를 만들었다. ‘Emperor’는 이 아홉 동물의 형태적 특징을 응용한 인물을 구현했다. 이 작품에 대해 손동현은 “그림 안에 형상이 정말 살아 있는 존재라면, 자기 스스로를 우리 시대의 ‘용’이라고 믿는 영웅 혹은 악당이 아닐까’라는 상상을 했다”고 말한다. 전시는 다음달 11일까지.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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