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경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갑을 맞이하여 피아제 남녀 손목시계 한 세트를 2억원에 구입하여 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를 통하여 노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후 2007년 봄경 청와대 관저에서 노 전 대통령 부부와 함께 만찬을 할 때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감사 인사를 받았습니다.”
2008∼2009년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구속돼 수사를 받던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조사 과정에서 내놓은 뜻밖의 진술이다. 훗날 ‘논두렁 시계’ 논란으로 비화한 사건은 이렇게 시작했다.

◆‘논두렁 시계’ 논란 단초 제공한 박연차 전 회장
31일 박 전 회장이 지병으로 별세하면서 이명박정부 시절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에 새삼 이목이 쏠린다. 박 전 회장은 기업 경영으로 한국과 베트남 양국에서 큰 성과를 일군 기린아였으나 오늘날 기업인보다는 ‘노 전 대통령 후원자’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검찰은 공직자가 기업인한테서 시가 1억원 이상의 고가 시계를 받은 행위는 뇌물수수죄로 기소되어 유죄로 인정될 경우 10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 질 수 있는 중대한 범죄라는 점에 착안했다. 노 전 대통령이 “오랜 후원자인 박 전 회장에게 우리 가족이 돈을 좀 받아 쓴 것은 사실이나 대가성이 없어 뇌물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굳게 견지하며 버티는 상황에서 피아제 시계 수뢰 의혹은 노 전 대통령 측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적절한 무기라는 것이 당시 검찰의 판단이었다.

문제는 이 의혹이 너무 일찍 언론에 새나갔다는 점이다. 2009년 4월22일 KBS는 저녁 9시 뉴스에서 단독이란 이름을 붙여 ‘노 전 대통령의 시계수수’ 의혹을 처음 보도했다. 이에 검찰은 “우리(검찰) 안에 나쁜 빨대가 있다. 그 빨대를 색출하겠다”고 밝혀 검찰 내부의 수사 기밀이 특정 언론사로 유출된 사실을 사실상 시인했다. 빨대란 언론사에 고급 정보를 제공하는 은밀한 취재원을 뜻하는 언론계 용어다.
노 전 대통령이 대검 중수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은 다음인 2009년 5월13일 이번에는 SBS가 저녁 8시 뉴스에서 역시 단독이란 이름을 붙여 ‘노 전 대통령 부부가 검찰 압수수색에 대비해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다’는 취지로 보도했다.
이때부터 ‘박연차 게이트’란 원래의 이름은 사라지고 노 전 대통령 관련 사건은 ‘논두렁 시계’라는 다소 선정적인 명칭으로 대중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
◆만기출소 후 "노 전 대통령과 가족들에게 죄송"
당시 대검 중수부장으로서 수사 책임자였던 이인규 변호사는 훗날 “국가정보원이 노 전 대통령에게 망신을 안겨주기 위해 언론사에 정보를 흘린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나쁜 빨대’는 검찰이 아니고 바로 국정원이라는 취지다. 당시 국정원장은 이명박 대통령 신임이 두터웠던 원세훈 원장이었다.
오랫동안 미국에 체류해 온 이 변호사가 최근 귀국함에 따라 검찰은 ‘논두렁 시계’ 의혹 관련 재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이 변호사 말대로 KBS 등 언론사에 피아제 시계 관련 의혹을 흘린 사람이 국정원 관계자가 맞는지, 그렇다면 국정원은 검찰 내부의 수사 기밀을 어떻게 알았는지 등을 확인하는 게 재수사의 초점이다.

2009년 4월30일 노 전 대통령은 변호인이던 문재인 현 대통령과 함께 대검 중수부에 출석, 피의자 조사를 받았다. 당시 검찰은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박연차 전 회장을 불러 노 전 대통령과의 대질신문을 시도했다. 박 전 회장은 “돈과 시계를 노 전 대통령 가족에게 뇌물로 줬다”고 주장하는 반면 노 전 대통령은 대가성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대질신문은 꼭 필요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대질신문은 불발에 그쳤다.
노 전 대통령 사후인 2014년 2월 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한 박 전 회장은 소감을 묻는 취재진 앞에서 “노 전 대통령과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2002년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결국 대권을 거머쥐게 만든 후원자, 하지만 그 뒤 회사 경영비리로 검찰에 구속될 처지에 놓이자 선처를 받기 위해 “노 전 대통령 측에 뇌물을 건넸다”고 진술함으로써 결국 노 전 대통령을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한 장본인. 박연차 전 회장의 별세 소식을 접한 친노 인사들의 심기가 여러 모로 복잡하기만 할 것 같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