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자수’ 줄여 이미지 바꾼다
던킨이 사명에서 ‘도너츠’를 지운 것은 ‘도넛 전문 브랜드’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함이다. 사명에서 도넛이라는 국한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사업의 외연을 넓히는 방식으로 전략을 선회한 것이다. 최근 각국 소비자들 사이엔 기름에 튀긴 도넛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국내로 시선을 돌려보면, 던킨 매장은 2013년 900여개에 달했다가 지난해 686개로 감소세다. 던킨의 매출 중 절반 이상이 도넛이 아닌 커피나 음료에서 나오자 업체로서는 ‘도넛이 주력’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날 필요가 커졌다.
던킨의 본사가 있는 미국에서는 이미 2018년부터 사명 변경이 시작됐다. 국내는 이보다 1년 정도 늦게 사명 변경이 이뤄진 것이다. 국내 던킨 관계자는 “미국 본사가 사명을 변경한 뒤 국내 시장에도 도입할 것인지 꾸준히 협의했다”며 “국내 시장에 최적화된 전략을 고심한 끝에 사명 변경을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던킨은 대표 메뉴인 도넛을 사명에서 떼어낸 만큼 사업의 외연을 확장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던킨은 국내와 미국 모두 도넛을 중심으로 함께 곁들일 커피나 음료를 판매해 왔지만, 앞으로는 간편식 등으로 메뉴를 다양화한다는 계획이다. 던킨 관계자는 “사명 변경은 던킨이 도넛뿐만 아니라 커피, 간편식 등 메뉴를 확대하고 소비자에게 신선한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며 “그렇다고 도넛을 주력에서 제외하는 것은 아니고, 비주얼이나 맛, 품질 등에서 색다른 경험을 추구하는 소비자에게 맞는 메뉴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외식업계에서는 던킨과 같이 사명을 줄여 이미지 변신에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타벅스는 2011년부터 로고에서 ‘스타벅스 커피’라는 글자를 완전히 지웠다. 대신 신화 속 바다 요정이 그려진 ‘세이렌’ 로고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역시 커피 이외의 다른 식음료 등으로 확장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기존의 사명에서 머리글자만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켄터키프라이드치킨’를 뜻하는 KFC도 1991년 사명을 바꾼 사례다. 던킨과 마찬가지로 튀긴 음식을 뜻하는 ‘프라이드 치킨’(fried chicken)을 부각하지 않으려는 취지에서였다. LG패션은 2014년 사명에서 ‘LG’를 과감히 가리고 LF로 변경했다. LG패션의 머리글자이면서 동시에 미래생활문화기업을 뜻하는 ‘라이프 인 퓨처(Life in Future·LF)’로 사명을 바꾸고, 생활문화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현대상선도 최근 사명을 ‘HMM’(Hyundai Merchant Marine)으로 바꾸는 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사는 그동안 현대상선과 HMM이라는 사명을 혼용해 왔는데, 세계 3대 해운동맹 중 하나인 ‘디 얼라이언스’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영문표기인 HMM으로 단일화하는 안을 논의하고 있다.

5인치 안팎의 작은 스마트폰에서 승부를 봐야 하는 ICT(정보통신기술) 기업이라면 사명이 짧을수록 유리하다. 대표적인 ICT 기업 중 한 곳인 NHN엔터테인먼트는 지난해 사명을 NHN으로 바꿨다. 2000년 한게임과 네이버가 합병해 탄생한 NHN은 사명에서 ‘엔터테인먼트’를 떼어내 기존의 게임사업을 넘어 클라우드와 AI,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했다. NHN은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NHN만의 장점을 살려 기술발전과 사업 확장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나갈 계획”이라며 “한국을 대표하는 ICT 기업으로 주주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기업 가치 향상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합병한 카카오도 사명을 ‘다음카카오’로 내걸다 ‘카카오’로 변경했다. 당시 카카오는 “합병 전 두 회사 이름인 다음카카오라는 사명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며 “모바일 정체성을 강화하고 기업 브랜드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사명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하이퍼커넥터’·‘솔루션’… 신사업 의지 반영키도
사명을 줄이기보다 포괄적 의미를 담은 이름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기업 경영의 변곡점을 앞두고 기존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인식을 바꾸기 위함이다.
SK그룹은 SK텔레콤을 비롯해 SK브로드밴드, SK종합화학, SK인천석유화학 등의 사명 변경을 적극 추진 중이다.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은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0’에서 사명 변경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SK텔레콤은 기존 사명에서 ‘텔레콤’을 떼어내고 ‘SK하이퍼커넥터’ 등으로 변경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소비자에게 각인된 ‘통신기업’이란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회사인 11번가(유통), ADT캡스(보안), 티브로드(미디어) 등을 포괄한 기업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해서다.
박 사장은 “현재 SK텔레콤의 전체 매출 중 통신 부문 비중이 60%인데, 50% 미만으로 내려가면 SK텔레콤을 대신하는 이름으로 바꿔야 하는 기점으로 본다”며 “사내에서는 ‘초협력’이라는 의미의 ‘SK하이퍼커넥터’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SK텔레콤 내부적으로는 통신분야 외에 자회사를 모두 포괄하자는 것이고, 외적으로는 ICT 기업 간 협력한다는 의지”라고 강조했다. SK는 SK텔레콤을 비롯한 주요 계열사들의 사명 변경과 관련해 내부에서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큐셀앤드첨단소재와 통합한 한화케미칼은 새해부터 ‘한화솔루션’이란 사명을 사용하고 있다. 석유·소재 사업과 태양광 사업의 통합을 통한 시너지효과로 새로운 ‘솔루션’(해결책)을 제시하겠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한화 측은 “경영관리 효율성 제고와 사업시너지 증대 효과도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기업에 사명은 고객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첫번째 수단이자 정체성이다. 어떤 사명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패가 갈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기업들이 경영 전략에 따라 사명 변경을 추진하는 이유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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