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노무현정부가 출범했을 때 안희정(54) 전 충남지사와 이광재(54) 전 강원지사는 30대 후반의 젊은이였다. 이른바 ‘좌(左)희정, 우(右)광재’라는 별칭과 함께 정권 핵심 실세로 부각했다.
이후 1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영예를 누리기도, 때로는 고초를 겪기도 했던 두 사람의 ‘운명’이 확연히 갈렸다. 올해 들어 성폭력 혐의로 징역형이 확정된 안 전 지사는 정치생명이 사실상 끝난 반면 새해를 눈앞에 둔 연말 안 전 지사는 특별사면을 받아 정치활동 재개가 가능해진 것이다.
◆노무현 곁 지킨 '정책통' 이광재, '조직통' 안희정
30일 법무부가 발표한 특사 명단에 오른 이 전 지사는 안 전 지사와 1965년생 동갑이다. 두 사람은 학번도 83학번으로 같다. 이 전 지사는 연세대 화공과를, 안 전 지사는 고려대 철학과를 각각 졸업했다. 둘 다 86세대로 1980년대를 ‘운동’과 ‘투쟁’으로 아주 뜨겁게 보냈다.
두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말 그대로 ‘불가분’의 관계다. 원래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지원으로 정치권에 입문한 노 전 대통령이 1990년 3당합당에 반발, YS와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걸던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
노 전 대통령이 YS정부 시절 ‘차기’를 노리며 만든 연구소 겸 일종의 선거 캠프가 바로 ‘지방자치실무연구원’이다. 이 단체는 김대중(DJ)정부 시절 ‘자치경영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노 전 대통령을 위한 싱크탱크 역할을 계속했다. 사무실이 서울 여의도 금강빌딩에 있다고 해서 그 소속원들은 ‘금강팀’으로 불렸다.
1988년 ‘청문회 스타’로 반짝 떴지만 이후 한국 정치의 양대 보스인 YS 및 DJ와 거리를 두며 정치 무대의 중심에서 배제된 노 전 대통령 곁을 지킨 이들이 바로 안 전 지사와 이 전 지사다. 1990년대 안 전 지사는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과 자치경영연구원 사무국장을, 이 전 지사는 자치경영연구원 기획실장을 각각 지내며 ‘금강팀’의 핵심 멤버로 자리매김을 했다. 직책명에서 알 수 있듯 안 전 지사는 ‘조직통’, 이 전 지사는 ‘정책통’이었다.

◆2010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나란히 도지사 당선
2003년 노무현정부가 출범했을 때 둘의 희비는 엇갈렸다. ‘정책통’인 이 전 지사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맡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으며 정치 일선에 뛰어든 반면 ‘조직통’인 안 전 지사는 2002년 대선을 전후해 노 전 대통령 선거 캠프가 불법으로 걷은 정치자금에 대한 형사책임을 져야 하는 신세로 내몰렸다.
이 전 지사가 청와대를 나와 17대(2004∼2008)와 18대(2008∼2010)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안 전 지사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다. 2003년 정자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만기출소한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듬해인 2010년은 두 사람에게 모두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이 전 지사는 강원도, 안 전 지사는 충청남도에서 각각 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나란히 당선된 것이다.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도백’의 자리에 오른 둘을 놓고 정치권과 언론은 ‘차세대 대권주자’라고 부르며 치켜세웠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런 ‘동반성장’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 전 지사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한테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고 2011년 대법원이 유죄를 확정하며 결국 도지사직을 잃었다. 그때부터 8년간 이 전 지사는 정치권 밖에 머물러야 했다.

◆성범죄와 특별사면… 운명 엇갈린 안희정·이광재
반면 안 전 지사는 2014년 충남지사 재선을 기록한 데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파면으로 조기 대선이 치러진 2017년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후보로까지 부상했다. 비록 당내 경선에서 현 문재인 대통령에 패해 대권 도전의 꿈은 좌절됐으나 많은 이들은 그가 ‘차기, 그러니까 2022년에는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렇게 희비가 엇갈리는 듯했던 ‘좌희정, 우광재’의 인생 역정은 올해 다시 변곡점을 맞았다. 도지사 시절 여성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는 대법원에서 징역 3년6개월 실형이 확정되며 순식간에 추락했다. 정치권에는 ‘안 전 지사의 재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이가 많다.
2020년 총선이 채 4개월도 안 남은 이날 이 전 지사는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됐다. 그동안 그를 옭아맨 족쇄가 풀리면서 정치적 재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평생의 동지’ 안 전 지사는 나락으로 떨어진 마당에 혼자서만 기회를 잡는 것이 영 미안했던 걸까. 이 전 지사는 정치활동 재개를 묻는 언론의 질문에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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