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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법령 속 일본식 용어 바르게 다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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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2-16 23:54:22 수정 : 2019-12-16 23: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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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물의 일부인에서 표시된 날’이라는 문구가 있다. 무슨 의미일까? 우편물의 내용 중 일부와 관련된 내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부인(日附印)’은 도장의 한 종류이다. 편지나 소포 등 우편물을 부칠 때 날짜를 표시하기 위해 찍는 도장이 바로 ‘일부인’이다.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물건이지만, 이름만 봐선 어떤 물건인지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일부인’이 유달리 낯선 한자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 단어가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고,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그날의 날짜를 찍게 만든 도장’을 가리키는 ‘일부인’을 우리말인 ‘날짜도장’으로 고치면 훨씬 더 직관적이고 알기 쉽다.

김형연 법제처장

일반 국민은 물론 전문가, 매일 같이 법령을 접하는 법제처 직원에게조차 법령은 쉽지 않다. 법령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법령 속에 있는 낯설고 어려운 용어들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일본식 용어가 있다.

일본식 용어는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해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용어를 말한다. ‘거래선(去來先)’이 그 예이다. ‘거래선’의 ‘선’은 일본에서는 ‘목적지, 장소’를 의미하지만, 우리 한자로는 ‘우선’을 의미하므로 뜻을 풀면 어색해진다.

이 외에도 ‘가도(假道)’나 ‘레자’도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다. ‘가도’의 접두사 ‘가(假)’는 일본에서는 ‘임시’를 뜻하는 말이지만, 우리말로는 ‘가짜’를 뜻하므로, ‘임시도로’라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또 ‘레자’는 일상에서 ‘인조가죽’이란 뜻으로 사용되지만, 원어인 ‘레더(leather)’와의 연관성은 찾기 힘들다.

이처럼 우리 언어생활에 맞지 않고, 일상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일본식 용어는 이에 대응하는 우리말이나 쉬운 한자어 등으로 적절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법제처는 2014년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의 하나로 법령 속 일본식 용어 정비를 추진했다. 위에 언급된 용어를 포함해 ‘구좌, 부락, 계리, 미불’ 등 일본식 용어 37개를 선정하고, 이를 ‘계좌, 마을, 회계처리, 미지급’ 등 국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정비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아직 우리 법령에는 일본식 용어가 남아 있다. 일본식 용어 상당수가 이미 우리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제처는 2020년 또 한 번의 일본식 용어 정비를 준비하고 있다. 기존 정비보다 좀 더 세심하게 법령을 들여다보려 한다. 정비 대상인 법령 속 일본식 용어를 선별하기 위해 국어, 일본어, 법률 관련 전문가에게 자문을 하는 등 용어 정비를 위한 걸음을 내디뎠다.

올해로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지 7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잔재가 법령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할 문제다. 일본식 용어 정비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회 각계각층의 협조가 필요하다. 법령을 만들고 집행하는 각 기관과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통해 우리말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법령 속 우리말이 힘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올 초 ‘말모이’라는 영화가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상영됐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라는 영화 속 주인공의 말을 다시 한 번 깊게 새겨야 할 때다.

 

김형연 법제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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