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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낙성대와 강감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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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2-27 22:40:50 수정 : 2019-12-27 22: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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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봄 낙성대 길에서 캠퍼스엘 들어설 즈음에는 관악 정상에 잔설이 남아 있고 그 아래로 파란 싹이 움트기 시작하는 계절의 풍미는 이 캠퍼스가 아니면 누리기 힘든 귀한 자산이다.”

최근 별세한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행정학)가 2011년 이 대학 학보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 일부다.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서울대 후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흔히 ‘낙성대 길’로 불렸다. 역과 학교를 오가는 마을버스가 있어도 길이 예쁘고 또 비교적 가까워 시간이 넉넉한 이들은 곧잘 걸어다녔다. 김 명예교수 말처럼 멀리 관악산 쪽을 보며 발길을 재촉하면 낙성대공원, 교수 아파트, 총장 공관, 후문 경비실, 그리고 기숙사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김태훈 특별기획취재팀장

낙성대공원은 낙성대가 고향인 위인을 기리는 곳이다. 1018년 고려를 침략한 중국 요나라의 10만 대군을 전멸시킨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이다. 낙성대라는 지명 자체가 장군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커다란 별이 그 마을로 뚝 떨어졌다고 해 생겼다. 공원 안에는 장군의 동상과 생가 터, 그리고 장군을 모신 사당 등이 있다.

관악구가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을 장군의 이름이 병기된 ‘낙성대(강감찬)’로 고치기로 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2004년 경춘선에 ‘김유정역’이 생겼을 때만큼이나 신선하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은 지명이나 건물명 등에 사람 이름을 활용하는 데 인색한 편이다. 인명을 따 지은 국내 최초의 기차역이 바로 김유정역일 정도다. 강원 춘천의 자랑거리인 유명 소설가 이름을 이 지역 공공건물 한 곳에 붙이는 것이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

어떤 이들은 “이름 석 자는 아니어도 호(號)를 쓴 사례는 이미 많지 않으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도산 안창호’나 ‘백범 김구’처럼 호와 이름을 국민 누구나 다 아는 위인의 경우에만 기념의 효과가 있다. 호가 없거나 있어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기리는 방법으론 적절치 않아 보인다.

강감찬 장군만 해도 사후에 ‘인헌(仁憲)’이란 시호가 추서됐다. 그래서 관악구에는 이름에 인헌이 들어간 거리나 시설이 여럿 있다. 요즘 ‘정치 편향 교육’ 논란으로 시끄러운 인헌고등학교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 가운데 인헌이란 단어에서 곧장 장군을 떠올릴 수 있는 이가 대체 몇이나 될까.

얼마 전 미국 공군사관학교가 캠퍼스 내 비행장에 ‘벤자민 데이비스’란 이름을 부여하는 성대한 명명식을 열었다. 흑인 최초로 미 공군 장성에 오른 벤자민 데이비스(1912∼2002)를 기리기 위해서다. 그는 젊은 장교 시절 조종사를 지망했으나 흑인이란 이유로 거부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결국 조종사가 돼 미군 승리에 기여하고 인종차별의 벽도 허물었다.

행사에 참석한 유족 대표는 “고인이 이런 뜻깊은 장소에서 오래 기억된다는 건 크나큰 영예”라고 소감을 밝혔다. 우리도 역이나 거리, 건물 등에 위인 이름을 붙이는 문화가 보편화했으면 좋겠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처럼 국가유공자 본인이나 후손 입장에서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김태훈 특별기획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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